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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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현재 건건동 삼천리 마을은 무와 배추·상추 등의 채소를 재배하여 인근 군포시와 안양시에 공급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는 고구마 재배지로 유명했다. 중남미가 원산지인 고구마와 감자는 조선 후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감자보다는 고구마가 먼저 전해졌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8세기 중반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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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에서 김양택 묘 회닺이 선소리꾼의 예언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김양택(金陽澤)[1712~1777]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 자는 사서(士舒), 호는 건암(健庵)이다. 1743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홍문관대제학을 거쳐 1776년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할아버지 김만기(金萬基)[1633~1687]와 아버지 김진규(金鎭圭)[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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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던 김양택(金陽澤) 선생의 묘가 있다. 김양택[1712~1777] 선생의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자는 사서(士舒), 호는 건암(健庵)이다. 광산김씨는 알다시피 조선시대의 명문 가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연리광김(延李光金)’이라고 해서 연안이씨와 광산김씨를 명문가문으로 사람들이 높이 추앙했는데, 광산김씨는 율곡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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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에서 토지를 이용하여 생산물을 얻어내는 경제 활동.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안산 지역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도시 개발로 인해 공업도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옹진군 대부면[현 대부동], 시흥시 양상동, 화성시 반월동 등의 농촌 지역이 편입되면서 도농 복합 형태의 도시로 변모하였다.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지만 안산 지역에서 근대적 농업이 시작된 시기는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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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삼천리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하얀 날개를 펼치며 마을 앞 논밭을 날아다니는 백로들이다. 마을의 앞뜰에 언제부터인가 백로가 다시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백로는 해마다 봄이 되면 찾아오는 삼천리 마을의 귀한 손님이었다. 조희복 옹은, 예전 어른들이 마을에 백로가 들면 마을이 부유해진다고 믿어서 백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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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장씨와 창녕조씨 두 집안은 삼천리의 위아래에 마을을 이루고 수백 년을 함께 살아왔다. 두 집안사람들이 수백 년을 큰 다툼 없이 지내 오면서 피를 나눈 한 가족이라는 정서가 마을 전체에 스며들어, 마을 사람들의 우애는 외지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매우 깊다. 이러한 우애는 각종 경조사를 함께 치르면서 기쁨은 서로 나누고 슬픔은 서로 덜면서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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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 터미산이다. 간혹 테미산으로도 불리지만 마을 사람들은 주로 재밋산이라고 한다. 산 정상이 움푹 파여 마치 사람 머리의 둘레[테미]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데 조희찬 옹에 따르면, 터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라고 해서 터미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터미산의 정상에 세워진 삼국시대 산성이 터미산성이다.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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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주변으로 세 개의 골짜기[막골, 소[우]물골, 텃골]가 내 ‘천(川)’자 모양으로 뻗어 있어 삼천리(三川里)라 하였다고 한다. 막골, 텃골, 메골 등 세 개의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하나의 하천으로 모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우물이 세 군데 있어 샘 ‘천(泉)’자를 써서 삼천리(三泉里)라는 설, 언젠가는 삼천 가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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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삼천리 에 사는 장동호 씨는 반월초등학교 졸업생이다. 장동호 씨의 아버지는 반월초등학교의 전신인 반월보통학교를 다녔다. 장동호 씨의 아들과 손자 손녀가 모두 반월초등학교 졸업생이다. 윗삼천리에 사는 조희복 옹도 반월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아들과 손자 손녀들도 모두 반월초등학교 졸업생이다. 예로 든 위의 두 사람뿐만 아니라 삼천리에 사는 사람들은 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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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동 삼천리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마을 사람 대부분이 농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의 비중이 커서, 논농사는 집에서 먹고 가까운 친척들에게 보낼 정도만 짓는다. 쌀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실제로 들이는 비용과 노력에 비해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기울이는 농사는 밭농사, 특히 채소 재배에 집중되어 있다. 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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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의 「지경다지기 소리」는 집터를 다질 때 부르는 노동요이다. 지경다지기는 ‘지경닺이’라고도 하여 집을 지을 때 집터를 고르고 기둥을 세울 자리의 땅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새 집을 지을 때 기초 공사로 시멘트를 사용하여 집의 바닥을 다지지만, 시멘트가 개발되어 들어오기 전에는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기에 집터를 단단히 다지기 위해 생각해 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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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다지 소리」는 사자(死者)를 장례지내는 장례 의식 중 분묘(墳墓)를 완성할 때에 부르는 노래로서 지방에 따라 「달구 소리」, 「달구질요」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회다지’는 땅 속에 매장한 시신에 물이 스며들지 않고, 장사를 지낸 후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분묘의 형태가 변하거나 뭉개지지 말라고 차곡차곡 다져주는 작업이다. 또는 산짐승에 의해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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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마을 사람들의 주업은 농사이다. 하지만 남부 지방처럼 대규모의 농업이 이루어질 만큼 농토가 넓지 않아 지역의 입지를 최대한 이용하는 근교농업이 발달했다. 삼천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고추, 콩, 고구마 순을 많이 재배하였으나 1980년대 들어와 마을 주변에 대도시들이 하나 둘씩 건설되면서 이곳 시민들에게 필요한 채소를 공급하는 방향으로 농사가 이루어졌다.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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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는 원래부터 안산의 끝에 숨겨진 한적한 마을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마을 앞 장고개를 넘어 반월장터로 바로 갈 수 있었고, 학이 내려앉았다는 학좌고개를 넘으면 지금은 군포시에 포함된 둔대리를 지나 과천으로, 또 서울로도 갈 수 있었다. 수원으로 가는 길도 편해서 안산 지역에서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왜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고 안산의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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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창말에 있는 고개. 매년 정월 초이틀에 소를 잡아 놓고 당제를 지내던 서낭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안동장씨 종중 땅으로 서낭당 앞으로 반월동과 군포시를 연결하는 도로가 확장되고 반월장에서 삼천리로 가는 길이 생기면서 지금은 삼거리 한쪽에 치우쳐 있게 되었다. 서낭당 당목은 엄나무이며 당제를 지낸 후에는 웃말, 가운뎃말, 아랫말의 우물에다 엄나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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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마을이 속해 있는 건건동의 행정동은 반월동으로, 안산시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인천에서 수원으로 가는 국도 42호선을 타고 안산 외곽을 돌아 지나면 용담뿌리를 거쳐 반월동으로 가는 길을 만날 수 있다. 반월농업협동조합 건물 앞에서 옆으로 난 좁은 도로를 500m 정도 가다 보면 위로는 반월저수지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삼천리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표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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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뜰 은 윗삼천리 아래로 흐르는 삼천천의 주변에 형성된 논밭이다. 뜰을 가로 질러 개천이 흐르는데, 이 개천 주변에 여기풀[정식 명칭은 여뀌]이 많다고 하여 여기뜰이라 불린다. 여뀌는 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로 키가 40~90㎝ 정도 자란다. 물고기를 기절시킬 정도의 독성분이 있어서 ‘어독초(魚毒草)’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지금은 한낱 잡초로밖에 취급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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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의 중심에서 삼천리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수인산업도로를 타고 가다 용담길을 지난 뒤 반월길에서 반월농업협동조합 건물 앞에서 옆으로 난 좁은 길을 타고 가야 한다. 아니면 반월장터에서 반월역을 지난 뒤 전철둑 아래를 거쳐 윗삼천리로 들어오는 길을 이용해야 한다. 안산 시내를 거쳐 반월동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는 일반버스 노선 3개와 좌석버스 노선 1개가 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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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마을에 근대화된 고구마 재배법을 전파한 오오야마[大山]라는 일본인이 언제 안산 지역에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처가가 육군 장성 집안이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상당한 권력을 배경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1933년 7월 27일자 『매일신보』의 “牛豚 1頭 鷄 30首 每戶마다 飼育 -漸滅하든 팔곡진흥기세 산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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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삼천리 마을의 고구마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지자, 일제는 전쟁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후방에서 동원해 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식량의 약탈이었다. 부족한 식량과 물자를 한국에서 약탈한 결과 한국에서는 더욱 식량이 부족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마가 구황작물로 각광을 받았다. 고구마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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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삼천리 마을은 그동안 마을의 대부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어 주택을 새로 짓는 것이 불가능했다. 최근 약 33,000㎡가 해제되기는 했으나 도로가 나지 않아 실제 개발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삼천리 마을이 안산의 도심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산시가 추진하는 도시발전계획의 관심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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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에 있는 산. 전각이나 문루 따위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은 매[鴟] 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를 치미(鴟尾)라고 하는데, 산의 생김새가 이와 비슷하게 생겨서 치미산(鴟尾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치미산 너머 삼천리에서는 건너치미라고 한다. 반월동사무소 뒤에서 창말까지 뻗어 있는 산으로, 반월동사무소 뒷산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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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산 에 올라가면 삼천리 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하여 오르내리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반월저수지 쪽으로는 경사가 매우 급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고는 오르내리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그 옛날 터미산성을 쌓을 때도 삼천리 쪽으로는 성벽을 높이 쌓으면서도 반월저수지 쪽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성 쌓기는 천혜의 지형을 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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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삼천리 마을은 현재의 군포시 대야미동과 같은 반월면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 대야미동은 개발이 진행되어 지가가 많이 높아졌으나 삼천리는 거의 변화가 없는 상태이니, 드러내 놓고 말은 안 해도 마을 사람들의 상실감은 의외로 큰 듯하다. 원래 반월도시계획은 반월면이 행정구역상 화성군에 속해 있을 때 작성된 것이다. 그래서 삼천리마을은 물론이고 당시 반월면에 속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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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재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묘상에서 좋은 싹을 길러내는 것이다. 좋은 싹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묘상에서 싹의 생육에 적합한 환경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육묘 방법이 이루어지고 있다. 삼천리마을의 고구마 재배법은 다른 지역과 다르다. 고구마 싹을 키우는 데는 싹이 트기 전에는 30~33℃의 고온이, 싹이 튼 후에도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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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삼천리 조희복 씨 집 앞에는 말라 죽은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향나무 아래쪽에 이제는 사람들이 쓰지 않아 덮어 버렸지만 과거에는 우물이 있었단다. 이 향나무를 돌아 좁은 농로로 들어가면 나오는 터널을 지나면 감절대가 나온다. 그리하여 이 감절대를 지나 들어가면 안산시의 숨겨진 마을이라는 삼천리에서도 더욱 숨겨진 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구석말이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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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삼천리 조희복 씨 집 앞에는 말라 죽은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향나무 아래쪽에 이제는 사람들이 쓰지 않아 덮어 버렸지만 과거에는 우물이 있었단다. 이 향나무를 돌아 좁은 농로로 들어가면 나오는 터널을 지나면 감절대가 나온다. 그리하여 이 감절대를 지나 들어가면 안산시의 숨겨진 마을이라는 삼천리에서도 더욱 숨겨진 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구석말이다.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