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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오오야마상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B020102
지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현우

삼천리마을에 근대화된 고구마 재배법을 전파한 오오야마[大山]라는 일본인이 언제 안산 지역에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처가가 육군 장성 집안이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상당한 권력을 배경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1933년 7월 27일자 『매일신보』의 “牛豚 1頭 鷄 30首 每戶마다 飼育 -漸滅하든 팔곡진흥기세 산본과장 호별방문”이라는 기사에 오오야마[大山]의 행적이 실려 있어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알 수 있게 해 준다.[기사 원문을 읽기 쉽게 고쳤음. 단 한글표기는 옛 표기를 그대로 사용함.]

-牛豚 1頭 鷄 30首 每戶마다 飼育-漸滅하든 팔곡진흥기세 산본과장 호별방문-

지난 21일 오후 1시 반에 경기도 금융과장 산본보웅 씨는…… 남산평을 차자가게 되엿다.

제1순으로 동(同) 진흥회(振興會) 회장인 대산강거(大山綱擧) 씨의 집에 이르러 각 호별 시찰을 시작하얏다.

남산평은 新洞名 팔곡1리로서 수년 전까지는 全 戶數 이십삼 호(戶)가 전부 극도로 피폐(疲弊)하야 하등의 생산도 업슬분더러 생활이 곤궁하야 거의 파몰의 참상에 이르게 되엇섯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에 大山 氏가 관직을 사임하고 本村에 住하게 되어 전 동민을 위하야 각 방면으로 지도 장려에 노력할뿐더러 솔선하야 다각적 농사방법을 시험하야 그 결과로 동민 일반에게 보급식히여 불과 수년 내에 각 동민들은 자작자급이 되어 그날 그날의 생활 정도는 향상하기 시작하엿다. 그뿐 아니라 규율적 통제를 실행하기 위하야 순산계를 조직하여 부근 산림을 이용함과 동시 全郡的 조직되는 산업도 조직하야 각기 노력한 결과 그네들의 생활을 점차 넉넉하게 되엇다고 한다. 그러다가 작년 10월경에 전선적(全鮮的)으로 실시되는 자력갱생의 초보(初步)인 농촌진흥회(農村振興會)로 전환하게 되엿다.

기반이 점차 견고하게 되어 지금에는 全戶 이십삼 호(戶)가 가축업에도 종사하야 돈(豚)이 각호 1두, 계(鷄)가 매호 30수, 우(牛)가 각호에 1두(頭)식(式)이라는데 이갓흔 가축업은 전부를 부인들이 하게 되어 부녀노동도 남자에 지지 아니할 만큼 실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외 작물로는 고구마를 장려하야 전 경작 면적이 칠백칠십사 반보(反步)로서 연 수확고가 이만 팔천 관이며 농작물 중 제2위를 점하고 잇다고 한다. 그리하야 감저(甘藷)의 지(枝)는 저장하엿다가 가축의 사료로 충당하며 특기(特記)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은 감저묘 저장법이라고 한다. 감저묘(甘藷苗) 저장법은 이래(邇來) 각 방면에서 연구 중인데 동촌(同村)에서는 온돌방에 저장하야 완전무결하게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식료품으로 불가결한 물품은 전부를 생산하게 되어 식료품은 일절 구입치 아니하고라도 넉넉히 생활하여 간다고 하여 동촌민들은 전부가 금융조합원으로서 부채(負債)는 불과 수십 원에 지내아니한다고 한다. 이를 시찰한 산본과장은 말하되 전 조선(朝鮮)이 이와 갓다면 우리들의 생활은 안정되리라고 하야 동회장 대산 씨에게 감사를 올이고서 동일행(同一行)은 당지(當地)의 명물인 은어(銀魚)를 잡아가지고 오후 8시 반 자동차로 수원을 향하야 출발하얏다.

오오야마의 직업에 대해서는 측량사였다는 설도 있고,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인 최용신을 뒤쫓던 고등계 형사의 이름이 오오야마인 것을 두고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오오야마는 성(姓)이고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마을의 원로들은 오오야마를 농사 기술을 가르쳐 주고 종자 개량을 하는 등 농촌진흥운동을 한 고마운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어서 고등계 형사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매일신보』 기사에 보도된 대로 오오야마의 본명은 대산강거(大山綱擧)로, 관직에 있다가 1920년대 초에 당시 반월면 팔곡리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 들어와 땅을 차지한 일본인 지주들은 대부분 권력과 결탁하여 한국인의 땅을 빼앗았다. 오오야마 역시 그가 산과 들을 측량하고 다녔다는 말로 미루어 반월 지역에 들어와 미등기된 산과 토지를 찾아 자기 토지로 만들어 대지주가 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안산시 일동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산(大山)이방죽’이 있는데 이 방죽을 쌓은 사람이 오오야마라고 알려져 있다. 방죽을 쌓기 전에는 일동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농사를 짓기가 어려웠으나 그가 방죽을 쌓고 갯고랑을 막아 저수지로 만들어 농업용수로 사용하면서 농사짓기가 편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다양한 농작물 재배법을 들여와 마을에 보급하였다.

오오야마는 처음에 약 6,661.60㎡의 토지에 배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배를 키워도 팔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이익을 보지 못하자 배나무를 뽑아 버렸다. 그리고 고구마 농사를 시작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그는 삼천리에서 유리온실을 만든 뒤 고구마 싹을 키웠다.

그리고 이 농장에서 일하던 조희찬 옹의 큰형님이 품삯으로 고구마 순을 가져와 마을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고구마를 재배했다고 한다.

오오야마는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면서 고구마 외에도 여러 농작물의 개량과 새로운 농법의 전파에도 힘을 기울였고, 남산뜰에 마을 공회당을 짓고 간이목욕탕도 지어주었다고 한다. 남산뜰의 민병무[76세] 옹도 어렸을 적에 큰 가마솥에다 물을 데워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목욕을 한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모든 행적은 순순하게 삼천리 마을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매일신보』 기사에도 보이듯이 그는 당시 반월면 팔곡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순산계를 조직하여 일제의 통치가 말단 마을까지 미치도록 하였고, 또한 당시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구호 아래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던 일제의 농촌개조운동의 첨병 역할을 수행했던 ‘농촌진흥회(農村振興會)’의 회장으로서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오오야마도 재산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황급히 떠났다. 그리하여 오오야마가 살던 집과 유리온실 등이 있던 남산뜰의 넓은 땅은 민홍식 씨가 인수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해방되기 전에 오오야마가 마을에 끼친 여러 가지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로 ‘오오야마 공적비’를 남산뜰 앞에 세웠으나 해방이 되면서 비석을 땅에 묻었다고 한다.

현재 오오야마 공적비가 있던 자리에는 ‘효도하는 마을’이란 글귀가 새겨진 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보제공]

  • •  조희찬(남, 1930년생, 건건동 거주)
  • •  민병무(남, 1934년생, 팔곡동 거주, 전 반월면 면장)
  • •  장동호(남, 1946년생, 건건동 거주, 전 안산시의회 의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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