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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택 묘와 선소리꾼의 예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B010201
지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현우

삼천리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던 김양택(金陽澤) 선생의 묘가 있다.

김양택[1712~1777] 선생의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자는 사서(士舒), 호는 건암(健庵)이다. 광산김씨는 알다시피 조선시대의 명문 가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연리광김(延李光金)’이라고 해서 연안이씨와 광산김씨를 명문가문으로 사람들이 높이 추앙했는데, 광산김씨는 율곡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 주요 관직을 차지하면서 명문 가문에 올랐다.

그러나 김양택의 집안은 높은 관직 때문에 명문 가문이 된 것이 아니라, 학문의 깊이가 깊은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는 성리학자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 김양택 선생의 조부인 김만기숙종의 장인이 되면서 김양택의 집안은 더욱 번창했다. 한국 고전소설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구운몽」의 저자인 서포 김만중김만기의 아우이다.

김양택 선생은 1743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홍문관대제학을 거쳐 1776년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대제학은 당대 학문과 인품이 가장 깊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오른다는, 벼슬의 꽃이라 불리는 관직으로 광산김씨 가문에서는 통틀어 7명을 배출하였다. 김양택의 경우 할아버지인 김만기와 아버지 김진규에 이어 3대(代)째 대제학을 지내어 명망이 아주 높았다. 이렇듯 3대가 대제학에 오른 일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고.

김양택의 묘에는 그와 그의 아들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김양택이 죽자 묏자리를 현 삼천리에 정했는데, 묘를 만들며 「회다지 소리」[시신을 땅에 묻고 흙과 회를 섞어 다질 때 부르는 노래]를 하던 선소리꾼이 소리를 메기면서 “양택의 맑은 물을 가재가 흐려놓는다.”는 뜻 모를 소리를 하였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여 무심코 넘겼는데, 훗날 아들인 김하재(金夏材)와 관련된 일이 생겼다.

김하재는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좌부승지에 올라 17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1784년 파직되었다. 그리고 그 해 영희전고유제(永禧殿告由祭)의 헌관으로 분향 후 정조의 실덕(失德)을 비판하고 사림을 때려죽이겠다는 등의 글을 적은 쪽지를 예방승지 이재학(李在學)에게 건네주었는데, 이재학이 이를 왕에게 고하자 대역무도죄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재산이 몰수되고 집은 부서져 집 자리는 연못이 되었고, 처와 자녀, 숙질 등은 멀리 쫓겨나 노비가 되고 말았다. 김양택도 아들이 역신으로 몰리는 바람에 관직이 추탈되었다가 훗날 복관되어 영돈령부사로 추증되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때 「회다지 소리」를 하던 선소리꾼이 “양택의 맑은 물을 가재가 흐려놓는다.”라고 한 소리 중에서 가재가 아들 하재(夏材)를 이르는 말이었음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김하재의 대역무도죄를 당시의 정치 상황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설도 있다. 당시 광산김씨는 거의 전부가 노론 가문에 속했는데,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노론이 시파와 벽파로 갈릴 때 대부분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벽파에 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함으로써 벽파는 세력을 잃었고, 정조 대에 대역무도죄인으로 김하재가 처형되면서 광산김씨의 일부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장동호 씨에 의하면, 김양택 선생의 묘 앞이 넓고 잔디가 잘 심어져 있어 예전부터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로는 으뜸이었다고 한다. 장동호 씨도 어린 시절 친구들이랑 학교가 끝나기만 하면 공을 가지고 와서 놀았는데, 지나가던 어른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이놈들이 건암 선생 묘의 잔디를 다 죽이는구나.” 하고 혼이 났다고 한다.

그 후 김양택 선생의 묘는 광산김씨 문중 땅에서 나오는 돈으로 주로 삼천리 사람인 장만진 씨가 관리하였으나, 최근 후손들이 선생의 묘역 약 2,000㎡를 제외한 문중 땅을 팔아 정리한 후 후손들이 관리하다가, 2007년에 그 후손들이 반월동을 떠난 뒤로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김양택 선생 묘는 이제 더 이상 정성껏 돌보는 사람이 없어, 마을 사람들이 가끔 돌아보기는 해도 잡초가 무성한 쓸쓸한 무덤이 되어가고 있단다.

[정보제공]

  • •  장동호(남, 건건동, 1946년생, 전 안산시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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