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E03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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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 종현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진호 |
김복동 옹은 1936년 11월 12일 아버지 김윤지와 어머니 강순장 사이의 8남매 중 위로 누나 하나와 형 둘이 있는 넷째로 태어났다.
호적상 이름은 김복동인데 마을에 동명이인이 있어 동네에서는 아명인 김선용이라고 해야 쉽게 통한다. 형제들은 성장하면서 모두 외지로 나가고 동네에는 시집간 누나만 살고 있어, 김복동 옹은 부모님 제사를 모실 때는 춘천에 있는 큰형님 댁으로 간다.
과거 섬마을의 살림살이가 그랬듯이 김복동 옹의 집안도 무척이나 가난하였다. 이 때문에 김복동 옹은 섬에 있는 대부보통학교[현 대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농사지을 땅이 하나도 없었기에 품팔이를 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김복동 옹이 17세 되던 해에 종현마을에 구봉염전이 생겼다.
김복동 옹은 그때부터 염전에서 막일꾼으로 염전일을 시작했다. 당시 중간 관리를 맡은 염부장들은 군자면 등의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23세 되던 해에 같은 마을에 사는 김해김씨 김옥분과 중매로 결혼한 김복동 옹은 곧 군에 입대하여 27세에 제대하였다.
그는 30여 년을 염전에서 일하다 1994년 염전이 폐업하면서 일을 그만 두었다.
30여 년의 염전 생활에서 20여 년은 염전을 관리, 감독하는 염부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염전 일의 전문가라고 자부하고 있다. 1970년대 초 건축일을 하느라 인천에서 2년간 혼자 생활한 것, 그리고 염전일로 충청도와 전라도 염전에 잠깐 근무한 것을 빼고는 퇴직할 때까지 마을의 염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토박이다.
김복동 옹은 염전에서 일하고, 부인은 농사를 지으며 해산물 채취를 하는 등 열심히 일하여 토지를 조금씩 장만했으며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위로 두 딸은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만 졸업시켰고, 그 아래 자식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대학교육을 시켰다. 특히 큰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열심히 일하는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팍팍한 섬 살림으로는 부부가 열심히 일해도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는 일이 힘들었는데, 성실한 큰아들은 장학생이 되어 부부의 짐을 덜어 주었다고. 김복동 옹이 자랑스러워하는 큰아들은 법학과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안산시의 고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결혼하여 외지에서 가정을 이루어 건실하게 살고 있다.
김복동 옹은 근면한 노력으로 1980년대 초반에 당시에는 드문 양옥집으로 깨끗하게 새로 짓고, 논과 밭을 구입하여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었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4층짜리 건물과 포도밭을 가지고 부부가 화목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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