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B02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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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삼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우 |
현재의 안산 지역은 공단 도시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공단이 들어서기 전의 안산 지역은 해안을 낀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다. 당시 안산 지역 중심지는 면사무소가 있던 군자면과 수암면, 그리고 화성군 반월면이었다. 그러나 2008년 현재 안산 지역에서 가장 발전이 더디고 낙후된 지역이 반월동과 수암동, 그리고 지금은 시흥시로 편입된 군자면이다. 이렇게 안산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은 완전하게 뒤바꾸어 놓은 것이 반월공단 조성과 안산 신도시 개발이었다.
안산 신도시 개발 계획은 1977년 3월에 기본 계획이 결정 고시된 ‘반월신공업도시개발계획’에 의해서였다. 도시는 크게 자연 발생적 도시와 계획 도시로 나뉜다. 현대에는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는 도시보다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정부가 주도적으로 정책을 수립하여 도시를 형성하는 계획 도시가 많아지는 추세이다. ‘안산 신도시’도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도시가 아니라 계획에 의해 형성된 도시로, 수도권의 산업과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정부에서 추진한 대표적인 계획 도시이다.
당시 정부의 계획은 공업 기능을 위주로 한 공업 도시이면서 주거 기능을 겸비할 수 있도록 자연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전원 도시의 성격을 갖춘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안산 신도시의 개발 배경에는 수도권의 과밀 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보려는 정부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안산 신도시의 건설 목적은 첫째, 새로운 공업 도시로서 서울에 조성된 공장을 수용함으로써 서울에 있던 쇠락한 공해성 공장의 반월 이전, 둘째, 서울의 인구 분산과 주택 문제 해결, 셋째, 서울에서 떨어진 독립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베드타운(Bed Town)이라는 위성 도시에서 탈피하여 한 도시 내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자급 자족형 도시 형성, 넷째, 중국 대륙과의 교류를 고려하여 서해안 개발의 거점 확보와 지방에서 서울로 유입되는 인구를 반월에서 1차적으로 흡수하는 방파제 구실의 도시, 다섯째, 미래의 신도시 건설에 대비한 선도적인 역할 수행 등이었다.
그렇다면 반월국가공업단지 건설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인구와 공장을 분산 유도하고, 서울에 있는 공장수의 증가로 나타난 공장 부지의 수요 증가를 해결하며, 경기도 내에 산재해 있는 제조업을 한 지역으로 집중시켜 집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데 있었다.
이 목표를 달성할 만한 공단의 입지 선정 요건으로는, 첫째 자연 조건으로 주거지 및 시가지에 공해를 배제할 수 있도록 풍향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단지를 조성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 지역 간의 연계성을 높이기 위해 서울을 비롯한 인천·수원·안양 등 공업 단지와의 화물 수송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철도 및 광행로의 근거리에 위치한 지역 및 큰 도로와 공업단지 사이에 화물 유통기지를 설치하여 신속한 교통 체제를 확립할 수 있는 지역을 고려하였다. 또 국토 이용의 효율화 및 공업단지 내의 기능적인 순환망을 구축하기 위해 해면[공유수면] 매립이 가능한 지역을 선정기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선정 기준에 따라 공단 조성 후보지는 경기도에 소재한 반월, 발안, 조암, 안중 등 4 개 지역이 선정되었다.
결국 반월국가공업단지는 경기도 안산시 초지동, 성곡동, 원시동, 목내동, 신길동 일대에 건설되었는데, 이들 지역이 선정된 이유로는 무엇보다 서울과 가장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점과 더불어 수원과 인천과도 근접하여 교통이 원활하고, 주변 도시에서 수월하게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으며, 남양만의 갯벌과 농촌으로 구성된 오지이기에 도시나 공단 건설에서 장애 요인이 많지 않음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은, 반월공단개발 계획이 고시된 1977년에 안산 지역으로 파견된 공무원들과 관련 기업 실무자들은 ‘어디에서 생활했을까?’이다. 공단이 건설되는 초지동, 성곡동, 원시동, 목내동, 신길동 지역에는 농사만을 짓는 마을들밖에 없어서 사람들이 장기간 먹고 잘 만한 곳은 없었다. 그래서 당시 공단과 관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월면 면소재지가 있는 반월동[당시 화성군 반월면]에서 먹고 잤다고 한다. 반월면은 당시에 숙박업소와 음식점들이 그나마 갖추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반월면 면소재지 앞에 있던 ‘반월옥’이라는 음식점은 설렁탕으로 유명해서, 군포와 서울에서도 일부러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도 ‘지원사업소’[반월출장소의 전신]의 공무원들과 개발을 담당한 수자원공사 직원들이 모두 반월옥에서 끼니를 해결했다고 한다.
다시 공단 건설과 관련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공단의 배후 도시로 개발된 곳은 갯벌을 막아 만든 간석지였다. 즉 초지동·성곡동·원시동·목내동·신길동 등 공단의 배후 지역으로 고잔동이 새로 개발되었고, 기존에 안산의 중심지였던 수암동·군자동·반월동 등은 개발에서 소외되었다.
그런데 반월공단은 왜 반월공단으로 이름 붙여진 것일까? 군자 또는 수암으로 하지 않고 반월공단과는 꽤 떨어진 반월면의 반월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공단을 기획했던 사람들이 반월면에서 숙식을 해결했기 때문에 친근한 이름인 반월을 사용했을 수도 있으며, 반월면과 당시 반월이란 지명이 서울과 좀 떨어진 곳이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땅 투기꾼들이 몰려들 것에 대비해 실제 공단이 들어서는 곳과 거리가 꽤 떨어진 반월이란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일견 그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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