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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장로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A030105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대광

고주물의 산 역사 박순기 장로는 고주물 마을의  밀양박씨 입향조 박관회의 후손이자, 박거겸 장군의 18세 후손이다. 어려서는 동네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친구인 정완종의 아버지가 훈장이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너빌에 살던 박용호 어른이 훈장으로 와서 수학하였다. 당시 같은 또래 30여 명이 거의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박순기 장로는 집안 형편이 어렵고 가난해서 늦게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야 배움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그 후 화정간이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934년에 안산공립보통학교 부설로 세워진 화정간이학교는 처음에는 입학자가 없어 일본인들이 강제로 취학 연령대의 아동들을 억지로 입학시켰다.

그래서 그 역시 강제 입학을 하여 다니게 되었는데, 교육과정에서 농업과 일본어를 특히 많이 배웠다.

박순기 장로는 당시, 자신이 남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단다. 또한 기왕에 늦게 시작한 공부인지라 먼저 시작한 친구들을 따라가려면 촌음을 아껴 더욱 부지런히 공부할 수밖에 없어서 친구들이 한자 두 줄을 익힐 때 박 장로는 여섯 줄을 암송할 정도로 열심히 하였다. 그러자 간이학교의 일본인 교사가, 간이학교를 졸업한 뒤 안산심상소학교 5학년으로 다닐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2학년에서 어찌 5학년으로 간다는 말입니까?” 라고 하여 4학년에 편입하여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일본어를 잘한다 하여 소사[지금의 부천]에 있던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일본인 회사에서 일을 할 무렵 일본인 과장이 “너는 내지인이냐? 조선인이냐?”라고 할 정도로 일본어를 잘 구사하였다고. 그 후 1년 만에 회사가 없어져 버리자 그는 마을로 들어와 농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박순기 장로의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1904년에 설립된 화정교회에 부모님이 다녀서 그도 어려서부터 자연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3·1운동 이후 마을 사람들이 수암 비석거리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관계로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는데, 교회 문을 다시 열기 위해 가장 노력한 분이 바로 박순기 장로의 어머니인 오금례 권사였다.

오 권사는 신앙심이 깊어 당시 ‘오사라 권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아들인 박순기 장로를 등에 업고 멀리 거모개교회[현 군자교회]까지 다녔다. 그 신앙을 이어 받은 박순기 장로는 6·25전쟁 이후에 자신의 땅을 교회에 희사하여 오늘날 화정교회가 크게 세워지게 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 후 그는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 마을에서는 통장 일도 하다가 지금은 노인 회장 직을 맡고 있다. 현재 80세가 넘은 박순기 장로는 고주물의 역사를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분이다. 어쩌면 그의 삶이 곧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고주물 역사의 산 증거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보제공]

  • •  박순기(남, 1926년생, 화정동 거주, 화정동 전 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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