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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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영어음역 | Uisaenghwal |
영어의미역 | Costum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집필자 | 전미영 |
[정의]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입고 생활하였던 복장.
[개설]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게 되며,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특별한 의례를 치르게 된다. 전통사회에서는 이러한 의례를 중요시 여겼으며 이러한 의식을 거행할 때 특별한 의복을 준비하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안산 지역의 사람들 역시 혼례나 돌잔치, 상례, 제례와 같은 의례를 행할 때 특별한 의복을 입었다.
[혼례복]
1. 신랑
경제적 여건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했으나 안산 지역에서도 신랑은 기본적으로 안에는 한복을 입고 겉에는 사모관대를 갖추었다. ‘사모관대’는 조선시대 관리들이 착용했던 관복의 일종으로 관리들이 평상시 근무를 설 때 입는 상복(常服)이다. 가슴 부분에 흉배를 수놓고 머리에는 사모를 썼으며, 허리에는 관대라는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인 띠를 두르고 목화를 신었다. 한복은 속에 고의적삼과 솜바지,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안산시 상록구 사동 한승인[1948년생]의 제보에 의하면 마을[지금의 사동]에서 신랑의 사모관대와 신부의 족두리나 원삼과 같은 혼례복을 관리하는 사람을 한 명씩 뽑고, 그 사람이 관리하면서 대여해주었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혼례를 한다 하더라도 혼례복을 따로 마련하기 어려워 마을에서 공동으로 구입하여 관리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상록구 팔곡동 이정숙[1946년생]의 제보에 의하면 당시 수원에서 안산으로 시집 올 당시 마을에 구비된 혼례복이 없어 자신의 고향인 수원에서 빌려 혼례를 치렀다고 한다.
2. 신부
신부 역시 경제적 여건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안에는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원삼을 입었다. 대개 노란색 삼회장저고리에 청색이나 홍색의 비단치마를 입었다. 속적삼은 비교적 가격이 낮은 광목으로 해 입었다. 저고리는 2개를 입는 것이 격식이나 대부분 1개만 입었고 2개를 입을 경우 속에는 분홍색, 겉은 노란색을 입었다.
하의는 속속곳에 바지 단속곳 치마를 입고, 치마 역시 2벌을 입는 것이 격식이지만 대개 1벌만 입는다. 신발은 당혜(唐鞋)를 신으며 가끔 고무신을 신는 경우도 있었다. 머리는 귀밑머리를 풀고 낭자머리를 했다. 아주까리나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단정히 한 뒤, 족두리를 얹고 앞에는 양쪽으로 앞드림 댕기를 비녀에 걸고 뒤쪽으로 큰댕기를 드렸다.
[돌복]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고 의료 혜택이 모자랐던 옛날에는 아기를 돌까지 키우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으므로, 돌을 매우 중요시했다. 또 이때에는 아이가 걷게 되므로 저고리와 아래옷을 만들어주며 남아와 여아를 구분하였다. 대부분 집에서 만들지만 돌 때는 이모나 고모 등 친척들이 해오기도 하였다. 남아는 바지저고리, 여아는 치마저고리를 입히고 타래버선을 신긴다. 타래버선은 코 끝에 수술을 달아 장식한다. 남아의 경우 가랑바지, 가래바지라 하여 용변이 용이하도록 바지의 밑을 텄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턱받이와 고무신을 함께 준비하였다.
[상복]
남자들의 경우 머리에는 굴건을 쓰고 삼베 중단을 입고 겉에는 제복을 입는다. 종아리에는 행전을 차고 짚신을 신는다. 결혼하지 않은 아들은 삼베 헝겊을 네모나게 잘라 얹고 박다리[首絰]를 썼다. 여자들의 경우 속에는 깃광목 치마저고리에 요절을 매었다.
[일상복]
1. 아이옷
아기는 태어나면 남녀구별 없이 배냇저고리를 입었다. 배냇저고리는 임신을 한 뒤부터 임신을 한 여성이 정성스럽게 손바느질하여 만들었다. 배냇저고리는 아이가 성장한 뒤에도 보관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의 배냇저고리를 차고 시험을 치르면 합격한다는 설이 있어 실제 시험을 칠 때 허리에 차기도 했다고 한다.
2. 성인옷
여성은 기본적으로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보통 치마는 검은색, 저고리는 흰색을 입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색이 있는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남자들의 경우 위아래 흰색으로 입었다. 겨울에는 방한을 위해 목화솜을 넣었다. 현대처럼 촘촘히 누비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목화솜을 넣은 뒤 중간중간 꿰매어서 고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