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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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莊精舍記 |
영어의미역 | The Record of Haejangjeongsa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준호 |
성격 |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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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장유 |
창작연도/발표연도 | 조선 후기 |
[정의]
조선 후기 장유가 경기도 안산 지역에 은거하던 당시 거처하던 해장정사에 대해 쓴 기문.
[개설]
장유(張維)[1587~1638]는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사건(誣獄事件)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자, 그로부터 12년간 장곡리의 매곡[鷹谷] 해변 본향(本鄕)에 내려와 살면서 노모 봉양과 학문 탐구에 전념한 바 있다. 이때 그가 안산에서 거처하던 곳이 해장정사(海莊精舍)로, 그는 이곳에서 손수 밭을 갈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까지 제자를 기르며 지냈다.
[내용]
「해장정사기(海莊精舍記)」에서 장유는 일생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으며, 미래를 향한 결연한 의지를 토로하였다. 즉 “집안이 원래 빈한하여 처자의 얼굴에 굶주린 기색이 완연했는데도 농사에 온 힘을 쏟아 굶주림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에 있던 6년 동안 온갖 참소와 비난에 겁먹고 시달렸는가 하면, 여러 가지 재난에 걸려들어 끙끙 앓아만 왔으니 허탈한 나날을 보내었을 뿐, 하루도 마음 편히 즐거운 날이 없었다.
이제 시골 고향으로 돌아오고 보니 변변한 초가집이나마 비바람을 가리기에는 부족함이 없고, 얼마 안 되는 논밭뙈기나마 밥을 지어 먹기에는 충분하다. 농사를 지으면서 틈이 날 때마다 깨끗이 방 하나를 치우고 향(香)을 피운 뒤 묵상하며 책을 뒤적여 오래 묵은 실마리를 풀기도 하고 시서(詩書)를 읊조리며 음미하기도 한다.”라고 안산으로 낙향한 이유를 먼저 진술하였다.
이어 이제 자신은 한낱 농사꾼임을 밝혔는데, “이제 시골로 돌아왔으니 나는 그야말로 한 사람의 농사꾼일 따름이다. 한 농사꾼이니 이제야 비로소 오늘날 세상의 손가락질을 면하게 되어 안심이 되는 것이다. 속세의 풍진이 나의 깨끗함을 더럽힐 수 없음은 물론이요, 시골 촌부(村夫)들과도 나의 그윽한 회포를 함께 나누며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이에 해당된다. 장유에게 안산은 세속으로부터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는 피난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문에서 그는 귀향(歸鄕)의 안도감과 농심(農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