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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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敬念 |
영어음역 | Gim Gyeongnam |
이칭/별칭 | 의전,신암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일제강점기 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개설]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의전(義田), 호는 신암(愼庵)이다. 아버지는 김정락(金定洛)이다. 1882년(고종 19) 지금의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활동사항]
김경념은 5세에 한문과 서예를 사사하였고, 약관 20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독학으로 사학과 법제·경제학을 두루 섭렵하였다. 1897년 신문화 수입을 주창하면서 부조금제의 폐지 등 신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국의 위기를 직감한 김경념은 청소년들에게 국가 수호의 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신교육기관인 옥성(玉成)·흥명(興明)·오봉(五鳳)·선화(善化)·남제(南薺) 등의 소학교를 위시하여 동지인 최광옥(崔光玉)[백낙준 전 연세대학교 총장의 장인]과 함께 각처에 초등학교 및 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육자 양성과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그 뒤 안창호가 주도하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밀결사와 국권 회복의 모의 및 국내외 항일 투쟁책으로 장남인 김청달(金淸達)을 상하이에, 2남인 김명달(金明達)을 만주에 파견한 것이 발각되어 안병찬(安秉瓚)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조병준(趙炳準)·백일진(白日鎭) 등과 함께 각처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안동현 이륭양행(怡隆洋行) 밀실에서 양준명(梁俊明) 등과 『독립신문』 지방판을 간행해 만주와 국내에 배달하여 항일정신을 고무하였다. 1919년 4월부터 국내 애국지사들이 상하이와 만주로 망명할 때 경의선 비현역과 백마역 중간 지점인 연대산장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압록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안내한 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장남·3남과 함께 삼부자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독립 자금을 모집하여 10여 차례 임시정부에 송금하였고, 1920년에는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용천군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1923년에는 선교사 매큔의 요청으로 선천(宣川)의 신성중학교·보성여학교의 교원이 되어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광복 후에는 반탁 운동에 참가하였고, 개성에 있는 3남인 김삼달(金三達) 자택에서 『대한독립사(大韓獨立史)』를 편찬하다가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장남 자택에서 1950년 향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