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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801
한자 國債報償運動
영어의미역 The National Debt Compensation Effor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07년 2월 2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08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대구
관련인물/단체 김광제|서상돈

[정의]

일제강점기 안산 지역에서 국민들의 모금으로 국채를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역사적 배경]

1905년 강제적인 을사조약 체결을 통해 통감부 체제를 구축한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기 위한 본격적인 식민지 기초작업에 착수했다. 아울러 자국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여 이를 식민지화 작업에 필요한 재원으로 충당하였다. 이러한 통감부의 차관 도입 정책에 따라 한국의 대일 부채는 1907년 2월 현재 1,300여 만 원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대한 상환 의무는 고스란히 한국 정부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목적]

대일 부채의 해결 여부는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족쇄인 동시에 이러한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관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고 고갈로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한국 정부에 있어 외채 상환이란 요원하기만 하였다. 이에 무능한 한국 정부를 대신해 전국민의 단결된 힘으로 대일 부채를 상환하고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저지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발단]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21일 대구의 김광제·서상돈 등의 발기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국채 1,300만 원이 국가 존망과 직결된다는 판단 하에 2천만 국민들이 3개월 간 금연하고 그 대금을 모아 국채를 상환하자는 내용의 취지서를 발표하고 모금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러한 국채보상 취지가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일거에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경과]

보상소 설립과 설립취지서가 발표되었고, 안산 지역의 주민들은 리(里)와 동(洞) 단위로 성금을 모아 중앙의 의연금 수납처로 송금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연활동에는 직위와 신분에 관계없이 각계각층이 망라되어 있어 국채보상에 대한 안산군민(安山郡民)의 의지를 짐작하게 하였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접수된 안산 지역의 성금 내역을 보면 아래와 같다.

초산면 목암리 7원 70전, 상직동 20원 40전, 하중리 27원 75전, 와리면 선곡리 3원 40전, 시우동 10원, 월곡면 하초평 7원 20전, 인화면 화정리 15원, 마유면 장상리 15원 25전, 장종리 6원 80전, 북방면 건건리 23원 20전, 팔곡일리 20원 70전, 팔곡이리 8원 5전, 둔대리 21원 65전, 속달일리 44원 90전, 속달이리 34원 40전, 대야미리 26원 45전, 도마교리 11원 10전, 성곶면 사리(四里) 37원, 분오리 17원 90전, 삼리 11원 2전 5리, 와리면 신각리 33원 55전, 신각리 야학사숙 1원 45전, 성두·무곡동 14원 55전 등이다.

[결과]

전국민의 단합된 항일 의지에 위기감을 느낀 통감부는 이 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방해 책동을 가중하였고 아울러 주도적인 위치에서 운동을 이끌어가던 지식인 계층의 분열과 추진 역량의 한계로 말미암아 국채보상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일본의 제도적인 탄압과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 및 세력들의 위축으로 1907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쇠퇴해 갔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을 저지하고 언론활동을 봉쇄하려는 일본의 탄압책은 더욱 구체화되어 대한매일신보사 사장인 배설(裵說)의 국외 추방과 총무 양기탁의 제거를 꾀한 수난 사건을 일으켰다.

배설을 추방하지 않는 한 『대한매일신보』의 예봉을 꺾을 수 있다고 판단, 1906년부터 집요하게 배설 추방 공작을 추진해 온 통감부는 1908년 5월 또다시 ‘보호권을 전복하고 일본인 배척을 선동하여 교사선동의 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배설을 공소하였다.

[의의와 평가]

약 1년 6개월 간 지속된 국채보상운동은 각지, 각계각층을 망라한 전국 규모의 운동으로서 비록 통감부의 탄압과 방해 공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외채 상환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전국민의 단합된 의지를 보여준 국권회복운동이었다. 또한 이 운동을 통해 항일 국권회복에 대한 전국민의 기대와 열의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항일정신은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민족해방운동으로 수렴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9.30 글자 수정 대구로 수정함
이용자 의견
ㅇ* 대국이아니라대구입니다 201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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