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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722
한자 韓德及
영어음역 Han Deokgeup
이칭/별칭 득지(得之),월곡(月谷),청녕군(淸寧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응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지도보기
성별
생년 1577년연표보기
몰년 1660년연표보기
본관 청주
대표관직 청주목사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득지(得之), 호는 월곡(月谷).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7세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직 한경남(韓敬男), 아버지는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현감 이담령(李聃齡)의 딸이고, 처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딸이다.

[활동사항]

한덕급은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서 태어났다. 문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1604년(선조 37) 석성현감(石城縣監), 1611년(광해군 3) 제천현감(堤川縣監) 등을 지내다가 아버지 한응인이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당하고 사사리[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내려오자 같이 돌아와 아버지의 억울함을 위로하며 받들어 모셨다.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자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아버지 옆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니 묘소 옆에 오두막집을 짓고 3년간 기거하면서 슬퍼하고 탄식하였는데 그 모습이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이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가까운 시대에 보기 드문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진안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노모의 병으로 나아가지 않고 1625년 개성부도사가 되었으며 1628년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가 되었다가 곧 통천군수로 나아갔다. 1634년 영천군수, 1641년 옥천현감을 거쳐 1646년 해주목사가 되고 이어 청주목사가 되었으나 탐학이 심하다하여 일시 파직되기도 하였다.

향리에 머물 때 수리산(修理山) 밑에 살던 이응희(李應禧), 고향의 유순인(柳純仁), 심부(沈溥), 유우인(柳友仁), 안홍제(安弘濟), 송규(宋珪), 이원득(李元得), 이경일(李敬一), 안중행(安重行) 등과 함께 시계(詩契)인 향로계(享老契)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656년 가선대부가 되고 아버지를 이어 청녕군(淸寧君)에 봉해졌다. 1659년 동지돈녕부사가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죽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삼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64년(현종 5)에 세운 신도비의 비문은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글씨는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전자(篆字)했다. 또 1666년에 세운 묘표의 비문은 송준길이 찬하고, 글씨는 대사헌 윤문거(尹文擧)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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