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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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光瀷 |
영어음역 | Lee Gwangik |
이칭/별칭 | 원숙(源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우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원숙(源叔). 판서 이계남(李季男)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이태석(李泰錫)이며, 어머니는 조수(趙琇)의 딸이다. 형은 호조참의를 지낸 이광직(李光溭)이다.
[활동사항]
이광익(李光瀷)[1703~1780]은 1733년(영조 9) 문과에 형과 함께 급제하였다. 1743년(영조 19) 사헌부지평을 거쳐 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사간원헌납·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1759년(영조 35) 함경도 종성부사로 재직할 때 북도어사(北道御使)가 선정을 베풀었다고 추천하여 임금에게서 숙마(熟馬)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또한 초산부사로 재임할 때 공미(公米)를 일정량만 남기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구휼에 힘써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고갯마루에서 거마(車馬) 10여 구가 이광익의 이삿짐을 실러 오자 보낼 물건이 없다고 할 만큼 청렴하였다고 한다. 당시 관찰사 이이(李彛)는 “이광익이 백성의 소(訴)가 있을 때마다 공평하게 시비를 가려 억울함이 없게 하였고, 부정한 수뢰 행위는 삼갔으며, 선정을 베풀었다.”라고 보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