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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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碩 |
영어음역 | Ryu Seok |
이칭/별칭 | 류석,덕보(德甫),개산(皆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보(德甫), 호는 개산(皆山). 아버지는 사옹원정 유시회(柳時會),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상주판관(尙州判官) 권길(權吉)의 딸, 처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이정혐(李廷馦)의 딸이다.
유석은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 6등으로 급제하였다. 1625년 홍문관정자로 있을 때 선조의 제7자이자 인조의 삼촌인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화를 당하자 한문제(漢文帝)의 포속지요(布粟之謠)[한문제가 무고에 의하여 이복동생인 유남(劉南)을 처형한 뒤 백성들 간에 널리 퍼진 그 일을 비판하는 노래]를 비유한 과격한 소(疏)를 올려 인성군을 구하고자 했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를 지냈다.
유석은 사람됨이 강직하여 사헌부장령 재직시 척화론(斥和論)의 대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을 “대명의리(對明義理)와 대청주전론(對淸主戰論)을 제일 열렬히 주장했으면서도 책임질 줄 모르고 군왕을 배반했으니 마땅히 문책해야 한다.”라고 탄핵했기도 했다. 또 문장에 뛰어났는데 특히 변려체(騈儷體)[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로 이루어져 수사적으로 미감을 주는 문체]는 당시 사대부들이 가히 소동파(蘇東坡)의 경지에 들어갈 만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있다. 1690년(숙종 16) 세워진 신도비와 함께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판중추부사 조경(趙絅)이 신도비문을 찬하고, 글씨는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썼으며 아울러 전자(篆字)했다. 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등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