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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548
한자 金陽澤
영어음역 Gim Yangtaek
이칭/별칭 사서(士舒),건암(健庵),문간공(文簡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안산시
성별
생년 1712년연표보기
몰년 1777년연표보기
본관 광산
대표관직 영돈녕부사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서(士舒), 호는 건암(健庵). 증조부는 김익겸(金益兼), 할아버지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아버지는 판서 김진규(金鎭圭), 어머니는 정소하(鄭昭河)의 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가 대제학을 역임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활동사항]

김양택은 1741년(영조 17) 생원이 되었으며, 174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겸설서가 되었다. 1746년 문학을 거쳐 부수찬이 되었으나 좌의정 정석오(鄭錫五)를 논박하다가 영조가 당습(黨習)이라고 노하여 산음현감으로 좌천시켰으나 곧 돌아와 수찬이 되었다. 1751년 존숭도감(尊崇都監)의 노고로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고 이어 영변부사로 나아갔다가 1753년 돌아와 대사간이 되었다. 이어 승지, 대사성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756년 다시 충청도관찰사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부제학으로 가선대부가 되어 원손(元孫)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762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어 우참,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776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아들 김하재(金夏材)가 역신으로 몰리는 바람에 관작을 박탈당하는 등 여러 가지 곤혹을 겪기도 하였으나 나중에 복구되었다. 영돈녕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건암집(健庵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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