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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선생문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495
한자 星湖先生文集
영어음역 Seonghoseonsaaengmunjip
영어의미역 The Collection of Works by Seongho Yiyik
이칭/별칭 『성호문집(星湖文集)』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시문집
관련인물 이익|이병휴|황덕길|이재남|이명익|이남규|이덕구|이병주|이좌|안희원
저자 이익
편자 이병휴|이명익|이남규
간행자 이덕구|이병주|이좌|안희원
저술연도/일시 1763년연표보기
편찬연도/일시 1774년연표보기
간행연도/일시 1917년|1922년[중간본]연표보기연표보기
권수 50권[밀양 퇴로리본]|70권[밀양 모렴리본]
책수 27책[밀양 퇴로리본]|36책[밀양 모렴리본]
사용활자 목판본
표제 星湖文集
간행처 밀양 퇴로리|밀양 모렴리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처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산 60-1[반포대로 201]|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 56-1[관악로 1]|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하오개로 323]|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3가 26-1[필동로1길 30]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안산에서 활동한 이익의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이익(李瀷)[1681~1763]이 죽은 지 11년 뒤인 1774년(영조 50) 조카 이병휴(李秉休) 등에 의해 필사본으로 초고 편집이 일단 70권 규모로 완성되었다. 1795년 채제공에 의해 목판본 간행을 추진한다는 통문까지 돌렸으나 간행되지는 못하였고, 이후 42년 뒤인 1827년에 안정복의 문인 황덕길(黃德吉)이익의 증손 이재남(李載南)이 다시 정리를 시도하였으나 황덕길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이어 63년 뒤인 1890년 이명익(李明翊)과 이남규(李南珪)가 50권으로 축소, 재편집하여 간행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1917년 7세손 이덕구(李德九)와 이병주(李炳主) 등에 의해 밀양군 퇴로리에서 목판본으로 50권 27책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이때 간행된 퇴로리판은 1774년 이병휴가 필사본으로 기초한 이병휴본과 체재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나 내용은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므로 1917년 간행된 퇴로리 판본이 미진함을 안타까워한 후학들이 몇 가지 자료를 다시 수정, 보완하였고, 이것을 1922년 이좌(李佐)·안희원(安禧遠) 등에 의해 중간본이 68권 36책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중간본은 『성호선생전집』이라는 책제로 간행되었다. 그러므로 현전하는 문집은 『성호선생문집』과 『성호선생전집』 두 본이 되는 것이다.

[형태]

1917년 간행된 밀양 퇴로리 판본의 지질(紙質)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저지(楮紙)로 되어 있고, 표제(表題)는 ‘성호문집(星湖文集)’으로 되어 있다. 퇴로리 판본과 1922년에 중간된 판본은 모두 1774년 조카 이병휴가 중심이 되어 편집해 두었던 구성과 내용의 체재 범위 내에서 간행되었기 때문에 목판본으로 일제강점기 때 간행되었다는 사실 외에 그 구성이나 체재는 조선 후기의 시문집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이익이 당대 어느 학자보다 학문적 깊이와 폭이 깊고 넓었기 때문에 체재나 내용적인 구성은 상대적으로 조선 후기의 문집을 대표할 만하다고 해석된다.

[구성/내용]

밀양 퇴로리본은 부(賦)·시(詩)·해동악부·서(書)·잡저·서(序)·자설(字說)·훈사(訓辭)·기(記)·제발(題跋)·논(論)·명(銘)·잠(箴)·찬(贊)·송(頌)·축문·제문·비(碑)·묘갈명·묘표·묘지명·행장·유사·가전(家傳)·전(傳)·잡전·정문(呈文) 등의 체재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모렴당본은 퇴로리본과 체재나 구성은 앞뒤 순서가 뒤바뀌었을 뿐 전체적인 구성은 다르지 않다. 다만, 후자는 수록된 편수가 많은 것이 특징으로, 퇴리리본에서 누락시킨 것을 복구한 내용이 있고, 이병휴본과 퇴리리판본에 없는 내용을 수록한 것도 있다.

1922년 중간본에 의하면 권1~6에 부·시, 권7~8에 해동악부(海東樂府)의 시, 권9~37에 서(書), 권38~47에 잡저, 권48에 잡저·잠·명·찬·송, 권49~52에 서(序), 권53에 기, 권54~56에 제발(題跋), 권57에 축문·제문·애사, 권58에 비명(碑銘), 권59에 묘표·묘갈명, 권60~62에 묘갈명, 권63~65에 묘지명, 권66~67에 행장·행록(行錄), 권68에 유사·전·소전(小傳)·잡전(雜傳) 등으로 되어 있다. 부록 권1은 가장(家狀)·행장·묘지·묘갈명, 권2는 연설(筵說)·시장(諡狀)·제문·찬·화상찬(畵像贊)·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권9~37까지의 서(書)에는 선배·친우·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로, 대개 경전에의 이설(異說) 또는 의문처에 대한 문답, 성리설에 대한 문답, 예설에 관한 논란, 그리고 당시의 폐정(弊政)을 논한 실학적인 내용들이 실려 있다. 권38에서 48까지의 잡저에는 경전 및 예설에 대해 논변한 것을 비롯하여 상례에 관한 논변을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그 밖에도 「제식(祭式)」·「기제(忌祭)」·「묘제(墓祭)」·「혼서식(婚書式)」과 같이 제례·혼례 등에 관한 논변이 있다.

특히 「일월식변(日月食辨)」·「황도변(黃道辨)」·「망해도해(望海島解)」·「논학제(論學制)」·「논과거(論科擧)」·「논붕당(論朋黨)」·「논전제(論田制)」·「논경장(論更張)」·「논노비(論奴婢)」 등의 논문을 통해 당대 폐정을 바로잡고 경제 제도적 측면을 개혁하고자 하는 주장이 실려 있다. 한편, 서(序)는 「맹자질서서(孟子疾書序)」·「대학질서서(大學疾書序)」·「성호사설서(星湖僿說序)」 등 자신의 저술에 대한 서문이 대부분이다.

부록에는 이익의 가계와 행적 등을 밝히고 있다. 가장은 조카인 이병휴가, 행장은 문인 윤동규(尹東奎)가, 묘갈명은 채제공(蔡濟恭)이 썼고, 연설(筵說)은 류후조(柳厚祚)가 추존을 상주한 글이다. 제문은 안정복(安鼎福) 등이, 찬은 이정두(李廷斗) 등이 썼다.

[의의와 평가]

『성호선생문집』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이익의 저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문집으로 조선 후기 문집의 표준적인 전형의 하나로 평가된다. 담겨진 내용들이 당대 거유였던 이익과 관련된 사실들이라 역사적인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은 편이다. 시문은 국문학 연구 자료로서, 그리고 묘갈명·묘표·묘지명 등은 조선시대 인물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문집 가운데 특히 서(書)와 잡저에서 그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의 경향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논변은 전통적인 유가 사상을 존중해 받들면서도 실사구시적 견해로 당시의 시무(時務)와 실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은 연구와 이론을 전개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현전하는 두 간행본과 초기 필사본, 그리고 이익의 유저로 알려진 저술들을 모두 합친 어느 정도 완전한 『성호선생문집』의 규모와 내용을 제대로 구명해 내는 연구도 향후의 과제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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