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C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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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삼덕리 1구 하덕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호 |
옛날, 덕문이 방죽에 임꺽정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삼덕리 1구 하덕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전설이다. 또한 고려시대 임연 장군의 집터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게 이 전설에 대해 물어 보기 전 문헌에는 어떻게 소개되어 있는지 사전 조사를 한 후, 우리는 하덕버스정류장을 지나 하덕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추억 속의 연꽃방죽]
삼덕리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지금도 연꽃 이야기만 나오면 향긋한 추억에 빠져들 정도로, 현재 하덕마을 일부가 원래는 연꽃으로 가득 했던 방죽이었다고 한다.
“연꽃이 아직도 있었으면 이 하덕이 관광지로 유명했을 거야. 서울이랑도 가깝고 해서 아주 좋아. 또 사람들이 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향기에 취해서 쉴 수 있는 공간으로도 최고였을 텐데 지금은 다 메우고 집을 세웠으니까 한편으론 아쉽지.”
물난리를 겪고 난 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방죽을 메운 뒤 집을 짓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근데 이곳에 물난리가 심하게 나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새 터를 잡아 주고 집을 짓게 했기 때문에, 이 방죽이 어려운 사람을 살린 대단한 것이지.”
이렇듯 덕문이 방죽에는 마을 사람들의 추억 말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숨겨져 있었다.
[방죽에 임꺽정이 살았다지]
『내 고장 전통 가꾸기』에는 삼덕리 하덕마을 방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시대 욕심 많고 인정이라곤 손금만치도 없는 임꺽정이가 덕문이 방죽이 있던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대궐보다도 크고 웅장한 기와집에서 머슴 수십 명을 두며 덕문이 넓은 들을 거의 독차지하고 부자로 잘살았다. 임꺽정은 자기가 잘산다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천대까지도 하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해 따스한 봄날, 한 시주승이 임꺽정의 집을 찾아왔다. 그런데 시주승이 시주할 것을 권하자 거름흙을 푸던 머슴이, “쌀 대신 이것을 시주를 할 테니 받아 가시오.”라고 하면서 거름흙을 한 삽 푹 파서 스님이 메고 있는 바랑에 넣었다.
스님은 하던 염불을 멈추고 말없이 돌아섰다. 이 광경을 골방에서 베를 짜고 있던 임꺽정의 며느리가 보면서 ‘사람으로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천벌 받을 죄를 지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베틀에서 내려와 스님이 가신 곳을 찾아 나섰다.
어느 새 스님은 동구 밖을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며느리는 뛰다시피 쫓아가서, “스님, 조금 전 저의 집 머슴이 천벌을 받을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의 집으로 다시 가시면 시주도 후하게 드리고 머슴 대신 제가 스님께 용서를 빌겠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다.
그러자 스님은 뜻밖에도, “부인의 말씀은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부인께서 사시려거든 내 뒤를 따르시오.”라고 하였다.
스님의 말을 듣고 며느리는 베틀에 감겨 있는 도투마리를 잘라서 머리에 이고 스님의 뒤를 따랐다.
얼마를 가던 며느리는 고개를 넘게 되었다. ‘이 고개를 넘으면 내가 사는 집을 영영 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랬더니 대궐 같은 집은 온데간데없고 덕문이 넓은 들이 물바다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몸을 돌려 앞을 보니 스님은 그림자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며느리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도투마리를 이고 걸어가는 형태의 망부석으로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망부석은 부서지고 망가져서 지금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바위만 남았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