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B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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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용몽리 시장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수연 |
용몽리 시장마을에는 이사구 씨와 문금자 씨가 5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는 금잔디미장원이 있다. 장날이면 덕산읍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천과 음성 지역에서도 파마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두 사람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와 시장마을에서 미용실을 하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군대를 늦게 가게 되었지]
이사구 씨는 일곱 살에 부모님을 따라 평양에 가서 5년을 살았는데, 지금도 눈을 감으면 평양 시내가 눈앞에 보인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담배를 사는 것도 힘들어서, 당시 아버지와 큰형의 담배를 사기 위해 평양 시내를 걸어서 누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대동강을 건너 모란봉에서부터 내려서 담배를 사다 준 적도 있었단다. 쭉 그렇게 살다가 1945년 4월에 서울에 내려왔는데 8월에 해방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영등포에 살면서 문창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할 뻔했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간에 나이 차가 많이 났는데, 그중에는 애아버지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했으나 동생들은 졸업을 하지 못했다.
전쟁 통에 그는 책가방을 메고 아버지의 고향인 덕산에 와서 정착을 했다. 형이 군대를 가는 바람에 그는 형 대신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기에 군대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년 정도 숨어 다니다 결국 붙들려서 군대를 갔다.
3년간 군대 생활을 하고 나와서 지금의 아내와 1960년에 만나서 결혼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미장원을 하면서 낳은 큰아들이 마흔아홉 살이니 미장원을 한 지도 벌서 50년이나 된 셈이다.
[미용사 자격증, 그리고 네 군데나 미장원을 옮겨 다닌 이야기]
청원군이 고향인 문금자 씨는 미용사 자격증을 따려고 조치원에 있는 미용학원을 다녔다. 당시 조치원에는 극장이 두 군데나 있어서, 시간만 되면 극장 구경을 가며 영화 속에 푹 빠져서 살았다. 그 후 미용학원을 졸업하고 대전 은행동에 있는 미장원에 취직한 뒤 역 앞에 있는 고등기술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문금자 씨의 친정은 방앗간을 했는데, 일이 잘못돼서 부도가 나 집안 식구가 모두 강원도 영월 탄광 지대로 가 있었다. 결국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 문금자 씨는 영월로 갔다.
그런데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이사구 씨가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나서 덕산으로 오게 된 것이다. 고등기술학교에서 자격증을 못 받아서 충북대학교에서 시험을 쳐서 자격증을 받고 미장원을 차려서 생활을 시작했다. 연탄 한 장이라도 아끼고 모아서 조금씩 미장원을 넓혀 나갔다. 자리를 네 군데를 옮겨 다니며 미장원을 했는데, 지금 미장원 자리는 1978년에 지은 것이다.
집주인들이 어찌나 텃세가 심한지, 손님이 조금만 많다 싶으면 터무니없이 전기요금, 수도요금을 많이 내라고 하고, 기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집세를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한 마디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무조건 나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남들 중매 결혼할 때 우리는 연애결혼을 했어]
문금자 씨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사구 씨가 안타깝기도 하고 옛 생각도 나는지 옛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고생을 안 할 사람이 한 거지. 나는 이제 제대를 하고 났는데 돈 벌 데가 없었어. 어딜 가면 돈을 번데. 그래서 강원도 영월 탄광에 들어갔다고. 그런데 이이가 아버지 따라서 올라와 가지고 거기 미장원 있는데, 거기서 종업원 생활을 하고 있었어. 스무 살 적에. 나는 그때 이제 스물여덟 살이고. 그 미장원 바로 옆에 하숙을 하고 있었어. 그러다 이이를 만난 거 아녀. 그래 고향 어머니는 여기 용몽리에 계시고. 집에 왔는데 영월 탄광에 다시 못 가게 하는겨. 그래서 차일피일하고 그때는 증평훈련소에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다가 4·19가 터진 거여. 그래서 집에만 앉아 있었지. 그런데 이이가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내 결혼식 날이 정월 대보름이여, 음력으로. 강제로 나가면 안 들어오니까 붙들고 결혼식을 시켜 줘 가지고서. 그래서 이이가 여기서 고생할 사람이 아니야.”
문금자 씨는 이야기를 듣더니 이사구 씨의 옛 모습을 말한다.
“이 양반 첫번에 만났을 때는 참 좋았어. 인물도 좋고 목덜미가 아주 시선을 끌더라고.”
“연애 결혼한겨 우리!”
“그래 이제 집안은 어떻게 돌아가고 그런 생활이라는 건 아무것도 볼 줄도 모르고 건강하게 생긴 남자! 이 양반을 보고 ‘아 저 양반이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거야. 건강하니까. 참 다행히도 지금까지도 건강한 거야.”
그 이야기를 듣던 이사구 씨는 기분이 좋은지 선택을 잘한 것이라고 말한다.
“선택 잘했지 뭐. 잘못된 선택은 아니잖아. 내가 술을 먹어, 담배를 피워. 내가 일흔여섯 살이면 건강한 편이거든. 그래서 이제 삼남매 낳고 키워서 사는 거야. 손자만 일곱이여. 이렇게 둘이 만나고 애들 삼남매 키워서 손자만 일곱인데 그놈들 다 모이면 장정이여 이제. 그럼 됐지 뭐. 돈은 아무리 많아도 나중에 다 놓고 가는 거지.”
문금자 씨는 이 미용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것은, 이렇게 한 가정에 들어앉아서 살림을 알뜰하게 하면서 자식을 다 키우면서 자신의 생활을 갖춰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여자의 마음이고, 이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활이든 기술을 배우든 기초를 단단히 배워서 기초가 다져져야 무엇이든 잘 해나갈 수 있다고 교훈적인 말을 하였다. 속리산 법주사를 다니며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두 내외는 여전히 같이 미장원을 꾸리며 연애하듯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