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B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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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용몽리 몽촌마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서영숙 |
하늘이 맑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날 찾아간 용몽리 몽촌마을은 마치 동화 속 마을처럼 아기자기하니 한 폭의 풍경 같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을 입구에 ‘꿈마을’이라고 예쁘게 적힌 비석이 푸른 하늘과 함께 우리를 반겨 주는 듯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왼쪽 길가에 넓게 그늘을 만들고 있는 은행나무다. 1982년 11월 11일 진천군 보호수 제16호로 지정된 용몽리 은행나무로 조선 후기 채진형 선생이 심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면 몽촌마을의 유래를 알기 위해 우리가 찾아가는 몽촌노인회장인 채건병 할아버지가 사는 집이 나오고, 오른쪽 길로 쭉 가면 마을 우물을 지나 연꽃이 피어 있는 방죽이 나온다. 채건병 할아버지 댁은 들어가는 길이 구불구불하고 좁기는 했지만 그 길 끝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꿈말은 몽촌, 그러니까 구말]
용몽리 몽촌마을에 터를 잡은 사람은 채건병 할아버지의 12대조인 채진형(蔡震亨) 선생이라고 한다. 채진형 선생은 고려 후기 두문동 72현의 한 명인 채옥택(蔡玉澤)의 8세손이다.
조선 후기 인조 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한 적이 있다. 그때 채진형 선생은 공주에서 전의까지 인조 임금을 호종했다. 이후 난이 끝나 인조 임금이 한양으로 올라가자, 채진형 선생은 향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겠다고 지금의 덕산읍 두촌리에 있는 처갓집으로 내려왔다.
그렇다면 채진형 선생은 언제 몽촌마을로 들어온 것일까? 우리는 채건병 할아버지한테 채진형 선생이 평강채씨 진천 입향조가 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평란 후 인조께서 환궁하시고 순당 [채진형] 선생께서 진천으로 귀향하여 처가이신 강릉김씨 처서에서 임시 거처하시던 어느 날 저녁 현몽이 있었어. 그래서 익일, 그 이튿날 현장에 답사하시니 사람이 정착하기에 좋은 곳이거든. 그리하여 득지, 꿈에 얻은, 득지하신 대지에 거처하시면서 꿈에 득지했다 하여 꿈말, 몽촌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흘러서는 꿈말이 구말로도 부르게 되었다는 거여.”
채건병 할아버지는 그러면서, 꿈속에서 계시를 받고 마을을 일궜다고 하니까 꾸민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모두 증거가 남아 있는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지금도 순당 선생이 거처하시던 터가 보존되고 있어. 그 양반이 살던 터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고. 『순당집』에도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내가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순당집』에 기록되어 있다는 거야. 선생은 효종 10년, 1699년 6월 20일에 서거하셨어. 그 양반 돌아가신 게 향년 81세였다는 거야.”
진천문화원에서 발행한 『내 고장 전통 가꾸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원래 시장다리 가에 마을을 이루고 살던 선인(先人)들이 서기 1611년 홍수로 집이 떠내려가는 등 큰 수해를 입었다. 그런데 채진형 선생의 현몽으로 지금의 안꿈말 자리에 마을을 만들고 안주하게 되어 마을 이름을 꿈마을이라 불렀으며, 그 후 꿈말이 구말로 변했다고 한다. 『내 고장 전통 가꾸기』에 따르면, 채진형 선생은 본래 성품이 강직하여 광해조의 폭정을 보고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바른 말을 하다가 불리하게 되므로 관직을 그만두고 진천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