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A02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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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설 |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외구마을은 일명 효자촌(孝子村)이라고도 불린다. ‘효자촌’이란 이명(異名)에서 알 수 있듯이 외구마을은 예부터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예의가 바르며, 부모님을 잘 섬기는 동네로 유명했다고 한다.
신중희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최유경, 최사흥 부자 효자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외구마을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로 100m쯤 걸어가 봤더니, 문백에서 진천으로 가는 국도변 왼쪽 산자락에 최유경·최사흥 부자 효자문이 세워져 있었다.
이 효자문은 조선 세종 대 최유경과 최사흥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이다. 최유경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벼슬길에 있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부친상을 당하자 6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에게 봉양한 효자]
최유경의 여섯째 아들인 최사흥은 충청도 대흥현감무를 지냈다. 아버지를 닮아 효성이 지극하여 벼슬길을 버리고 집으로 와서 부모를 봉양하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부모가 병석에 눕자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봉양했다는 이야기는 신중희 할아버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으니까 대흥현감 벼슬을 사직하고 와서 자기 허벅지살을 베어서 아버지를 들였대, 그래서 아버지를 살렸다는 거야.”
[효심에 감동한 잉어]
그러자 임준호 할아버지가, “무릎을 꿇고서 그것이 녹아 가지고서 거기서 잉어를 꺼내다가 해 드렸다고. 강물이 꽁꽁 얼었는데, 자기 아버지 살리려고 무릎을 얼음에 데니까 얼음이 녹고 잉어가 툭 튀어나온 거야. 그 잉어를 잡아다가 잉어를 해 드려 가지고서 효자가 됐댜.”라고 말을 이었다.
최사흥은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 잉어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잉어를 구하러 갔다. 하지만 겨울이라 잉어를 구할 방법이 없어 며칠 동안 연못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 효심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무릎을 꿇은 자리가 녹게 되어 잉어를 잡아 가지고 가서 부모의 병을 낫게 했단다.
이러한 부자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대왕이 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최유경·최사흥 부자 효자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에는 일각 대문을 세우고 주변에는 시멘트 담장을 둘렀다.
정려문 밖 왼쪽에는 최사흥의 효자비가 있으며, 건물 내부 현판에는 “조선효자참찬의정부사평도공최유경지려효자승의랑행대흥현감최사흥지문(朝鮮孝子參贊義政府事平度公崔有慶之閭孝子承義郞行大興縣監崔士興之門)”라고 쓰여 있다.
효자비는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86㎝ 너비 63.5㎝, 두께 38.5㎝의 오석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었다. 비제는 ‘통훈대부행대흥감무최공사흥지비(通訓大夫行大興監務崔公士興之碑)’이며, 4면비이다. 비문은 최성규가 썼으며, 1973년 10월에 세웠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