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A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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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설 |
중부고속도로 진천 나들목을 통과해 바로 만나게 되는 국도 21호선에서 좌회전을 하면 진천군이 나온다. 진천 읍내 못 미쳐 있는 사거리에서 직진을 하다가 진천 읍내로 들어가 삼거리에서 직진한 후 문백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계속 달리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길다고 알려진 농다리를 만나게 된다.
[신비함이 넘쳐 흐르는 농다리]
농다리는 진천 읍내를 관통하는 백사천과 이월면을 적시는 덕산 한천이 합류해 흐르는 세금천 위에 놓인 다리다. 언뜻 평범해 보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설화와 전설·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천 년의 숨결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하지만 농다리는 조성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사료가 딱히 없고, 삼국시대 김유신 장군의 부친 김서현 장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놓았다는 설과 구곡리 출신의 임연 장군이 놓았다는 설 등이 분분하다. 또한 나라 안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다리가 운다는 등 전설 같은 이야기도 넘쳐나서 신비함을 더해 준다.
『상산지(常山誌)』에는 고려 고종 때 무신 임연이 그의 전성기 시절 별자리 28수를 응용해 세금천에 28칸의 돌다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들을 대략적으로 분석해 보면, 대체로 고려 후기에 다리를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농다리는 원래 28칸이었는데 6·25전쟁 중 3칸이 유실되었던 것을 2008년 8월, 충청북도와 진천군이 나서서 28칸으로 복원했다.
농다리는 중간 중간 돌들을 쌓아 교각을 만들고, 길고 넓적한 돌을 교각 사이에 하나씩 얹어서 만든 다리다. 이처럼 과학적이며 특이한 양식으로 짜여서 놓아진 농다리는 전국적으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소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또한 다리에 사용된 돌들은 철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약간 붉은색을 띠고 있는데 이 지역에는 이렇게 철 성분이 들어간 돌들이 많다고 한다.
농다리는 이렇게 문화재적 가치만 갖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예부터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복을 받고 소원을 이룰 수 있으며, 아낙네가 건너면 아들을 낳게 되고 노인들은 무병장수한다고 하여 지금은 관광 명소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삶의 일부분이 된 농다리]
농다리가 천 년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구산동마을 사람들의 농다리에 대한 사랑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농다리 이야기를 듣고 자란 마을 사람들에게 농다리는 시나브로 주민들의 삶의 일부분이 된 듯하였다.
우리는 중리 느티나무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고 계시는 할아버지들에게서 농다리가 자연 재해로 손실됐을 때도 마을 주민들이 농다리 보수에 함께 참여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임준호 할아버지는 농다리 보수를 할 때 돌을 주어 온 사람에게 옛날에는 귀했던 담배 한 가치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동네 사람이 모여서 보수를 하는데 돌 큰 거를 주어 온 사람에게는 담배를 하나씩 줬다구. 옛날에는 담배가 아주 귀했잖아.”
손재주가 좋다고 소문난 임기용 할아버지도 “그 전에는 1년에 한 번씩 보수를 했어.”라며 농다리 보수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담과 함께 임준호 할아버지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전에는 그 뒤에 논도 많고 그래서 떠내려가면 안 되니까 보수를 했다고. 전에는 담배가 귀했어. 담배 사다 한 가치씩 주면 젊은이들 일 잘했어. 개울에 가면 큰 돌 많어. 그래서 그걸 지고 와서 보수를 했지. 제일 큰 거 가져오는 사람이 담배 한 갑. 그 전에는 담배 한 갑도 굉장히 컸어.”
[문화재로 지정되다]
1976년 12월 20일 농다리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이후에는 예전처럼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보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국가에서 관리를 하는데, 일정한 자격이 있는 전문가만이 보수를 할 수 있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보수를 하기 시작하면서 너무 시각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농다리가 원래의 모습과 다르게 변해 간다고 마을 주민들은 안타까워했다. 예전에는 작은 돌을 서로 엇갈리게 끼워 맞추어 정교하고 튼튼하게 다리가 유지되어, 지금처럼 돌들을 서로 연결시키려고 석회를 바르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큰 돌들을 단순하게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보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장마 기간에 비가 많이 오면 세금천의 불이 불어 다리를 구성하고 있는 돌들이 쉽게 떠내려간다는 것이다.
임기용 할아버지는 “그 다리가 지금은 잘못 만들었어. 옛날에는 상판이 있구, 가운데 돌을 얹어 놓고 상판을 갖다 얹어 놓고 그래서 물에 안 떠내려갔어. 그런데 지금은 문화재니 뭐니 우리네는 갖다 놓지를 못하잖어. 그래서 그냥 단순하게 돌을 쌓아 올리지. 옛날에는 상판이 안 떠내려갔어, 그런데 지금 보면 선창이 좁고 돌을 이렇게 올려놨으니까 오물 같은 게 많이 떨어지면 걸려서 떠내려가는겨. 그래서 잘못됐다고 그러는 거지. 저렇게 놓으면 안 된다고 우리들이 그러는겨. 우리 어려서부터 떠내려가는 걸 못 봤어. 6·25전쟁이 났을 때 한 번 세 칸인가 여섯 칸인가 떠내려갔지.”라며 물의 흐름과 물살에 대한 저항을 고려하여 세굴 현상도 적게 나타나고 그만큼 안정적인 구조로 만들어진 농다리의 본래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