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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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美術 |
영어의미역 | Fine Ar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승철 |
[청의]
충청북도 진천군의 세계상과 인간상을 미적·조형적으로 표현하는 예술.
[개설]
한반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오면서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미술 문화가 전개되었으며, 이는 남겨진 유물이나 문헌 자료로 확인되고 있다. 진천군의 경우, 통일신라시대까지는 미술 활동의 흔적이 드물지만 고려시대부터는 불교 미술이나 공예 면에서 중요한 자취들을 남겼다.
[한국의 미술]
삼국시대 이후 고분에서 발굴된 고분 미술과 불교의 도래 이후 융성한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불교 미술에서 한국 미술 역사의 근원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공예 미술, 특히 도자기에서 한국 미술의 특색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한국 미술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표현되는 강점과 강조되는 주안점이 서로 차이를 보이면서 변화해 왔으며, 특히 청치적 변화에 따라 미술의 영향권도 크게 변화하는 특색을 보여 왔다.
삼국시대 미술은 청치·군사의 중심지, 즉 통치권의 블록에 따라 신라·고구려·백제가 약간씩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은 청치의 발달과 함께 각지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충청북도 지역에서는 주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당시 융성했던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유교의 발달로 불교 미술의 발달이 크게 퇴조하였다.
[진천군의 주요 불교 미술품]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영수사에 있는 「진천영수사영산회괘불탱(鎭川 靈水寺 靈山會掛佛幀)」은 석가모니 부처가 인도의 영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로 길이 835.5㎝, 너비 579㎝의 초대형 탱화이다. 원래는 진천읍 상계리 미역수골 백련암에 있었는데, 백련암이 폐허가 되자 영수사로 옮겼다고 한다.
묵기(墨記)에 따르면 1653년(효종 4) 7월에 화주 심인법사의 발원에 의하여 화원 승려 명옥·소읍·현욱·법능이 그렸다. 삼베에 채색을 넣어 그린 이 탱화는 300년이 지난 요즈음도 새로 그린 듯하고, 벌레가 먹거나 썩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가뭄이 들어 한해가 심할 때 이 괘불을 밖에 높이 달고 수행 중인 승도들이 기우 기도를 하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보물 제1331호로 지금까지 국내 최고(最古)의 괘불로 알려진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의 「흥국사 노사나불괘불탱(興國寺 盧舍那佛掛佛幀)」보다 40년이 앞선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크기도 두 배에 달한다. 1977년 12월 7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3월 12일 보물 제1551호로 변경되었다.
2. 「신잡 초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노곡마을에 있는 「신잡 초상(申磼 肖像)」은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청되었다. 신잡[1541~1609]의 행적에 따르면 1607년(선조 40) 신잡이 66세 되던 때의 모습을 김이섭이 그렸다.
비단에 그려 넣은 그림으로 가로 90㎝, 세로 167㎝ 크기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시선은 오른쪽을 바라보며,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사모를 쓰고, 중요 의식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으며, 가슴에는 두 마리의 학이 그려진 흉배가 표현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화풍을 잘 보여 주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잡의 자는 백준(伯峻), 호는 독송재(獨松齋)이며, 신립(申砬)의 형이다. 1583년(선조 16) 문과에 급제한 뒤 청언을 거쳐 이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승지로서 왕을 호종하고 비변사당상으로 활약하였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철산군 탈옥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형조참판에 기용되어 특진관이 되었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에 평천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그 후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로 충헌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