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5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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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安趙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삼덕리·읍내리|진천군 초평면 중석리·오갑리 |
집필자 | 강민식 |
세거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삼덕리·읍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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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중석리 |
입향시기/연도 | 조선 전기 |
성씨시조 | 조정 |
입향시조 | 조야호 |
[정의]
조정을 시조로 하고, 조야호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
[연원]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시조 조정(趙鼎)은 후당(後唐) 사람으로 신라 말에 귀화하여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김선평(金宣平) 등과 교유하였다. 왕건을 도와 합천에서 기의(起義)하여 931년(태조 14) 고창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그의 후손들이 함안에 세거(世居)함에 따라 함안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함안조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2명을 배출했는데 특히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유명하다. 조려는 단종 때 진사에 급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 백이산(伯夷山)에 들어가 낚시와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이밖에 충의공(忠毅公) 조종도(趙宗道)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선조 때 양지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 투옥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함양군수가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안의(安義)의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조계일(趙啓一)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조려의 8세손이다. 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후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심양에 볼모로 갈 때 호종하였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봉림대군이 가상히 여기고 시신을 본국에 보내어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조소앙(趙素昻)을 들 수 있다.
[입향경위]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의 셋째 아들 조야호(趙野虎)가 단종 복위사건 이후 진천읍 삼덕리로 낙향하면서 그의 후손이 550여 년간 세거하고 있다
[현황]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 관내에 거주하는 함안조씨는 145가구 442명으로 나타났다. 진천군 초평면 중석리 죽리마을에 약 50여 가구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