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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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 |
집필자 | 강민식 |
세거지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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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시기/연도 | 조선 후기 |
성씨시조 | 김시흥 |
입향시조 | 김응해 |
[정의]
김시흥을 시조로 하고, 김응해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
[개설]
김시흥(金時興)을 시조로 하는 김녕김씨(金寧金氏)는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7대손 김응해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로 이주한 이래 진천군에 세거하고 있다.
[연원]
시조 김시흥은 신라 56대 경순왕 부(傅)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의 증손인 김렴(金濂)의 6세손이다. 그는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토평하였으며, 명종 때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김녕으로 하였는데, 고려 말에 김녕이 김해로 바뀌면서 본관을 김해(金海)로 하고 본래부터 있었던 김수로왕계(金首露王系) 김해김씨를 선김(先金), 김시흥계 김해김씨를 후김(後金)이라 하여 구분해 오다가 혈족이 아닌 동성동본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조선시대 헌종 때부터 김녕으로 확정했다.
김녕김씨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많은 인물이 나와 중앙정계에서 기반을 굳혔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백촌 김문기를 들 수 있다. 김문기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 계획에 가담했다가 아들 김현석(金玄錫)과 함께 순절했다. 김녕김씨는 김문기 사건 이후 화를 당하여 후손들이 역적의 일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수난 속에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의 충절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1731년(영조 7) 10세손 김정구(金鼎九)의 상소로 신원 복관되고 시호가 충의(忠毅)로 내려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520년이 지난 1977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사육신의 한 사람임을 확인 사판(史判)하고 노량진 사육신의 묘역에 가묘가 봉안되었다.
[입향경위]
조선시대 문신 김문기의 7대손 김응해가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로 내주하기 시작하여 200여 년 동안 세거하고 있다.
[현황]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에 세거하는 김녕김씨는 83가구 252명으로 나타났다. 김녕김씨의 세거지로는 이월면 사당리가 있다.
[관련유적]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옥동리에는 김경세(金景世)[ ?~1636]의 묘소가 있다. 김경세는 162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36년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여 광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처 순흥안씨는 청군이 물러간 뒤 남편의 시신을 찾아 되돌아온 뒤 피를 토하고 따라 죽어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다. 정렬이 칭송되어 정려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