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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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蓮庵址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507-7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상일 |
성격 | 암자 터|절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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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초기국가시대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507-7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시루봉에 있는 초기국가시대에서 일제강점기 절터.
[변천]
백련암 터는 본디 길상사의 옛터로서, 일제강점기 백련암(白蓮庵)이란 작은 암자가 들어섰다가 이 암자도 없어지면서 빈터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길상사가 태령산(胎靈山)에 있는 사찰로 기록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태령산이 길상산이라고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에는 길상사에 대한 언급 없이 백련암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다.
길상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대략 개항기인 고종 때까지의 법등이 밝혀져 있고, 일제강점기의 기록인 『상산지(常山誌)』에 처음 나타나는 백련암의 경우 길상산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길상사와 백련암은 모두 진천의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으며, 백련암이 비록 10여 칸에 불과한 작은 암자이지만 ‘삼한고찰’ 또는 ‘나대고찰’이라 하여 역사가 매우 오래된 사찰로 소개되고 있어, 길상사와 백련암이 같은 위치에 있던 사찰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상산지』에는 「영수사 괘불(靈水寺掛佛)」이 원래는 백련암에 있던 것으로, 절이 폐사되면서 옮긴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영수사 괘불」은 하단의 묵서명에 1653년(효종 4)에 제작된 것으로 되어 있어 원래 길상사에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영수사에 거주하는 승려에 따르면, 영수사 목조관음보살좌상(靈水寺木造觀音菩薩坐像)도 괘불과 함께 백련암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하므로, 목불상 역시 이전에 길상사에서 봉안했던 불상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봉암(鳳巖) 채지홍(蔡之洪)[1683~1741]이 이곳 길상사에 들렀다가 지은 칠언절구의 시가 『상산지』에 전한다.
[위치]
진천읍 상계리 상목마을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시루봉이라는 산에 이른다. 이 산의 동쪽에 있는 버려진 밭을 따라 5부 능선까지 올라가면 높이 6~7m, 길이 약 60m의 성벽과 같이 높고 긴 석축이 보이고, 이 석축 위로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는데, 이곳이 백련암 터이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백련암 터는 오랫동안 민가에서 경작지로 이용했기 때문인지 뚜렷한 유구는 찾아볼 수 없다. 곳곳에 건물지의 단으로 보이는 석축들이 보이는데, 이들 석단들은 절터 전체로 보아 크게 2~3층으로 나누어지며, 드문드문 끊어져 마치 돌무지처럼 보인다. 석단 주위에 주춧돌로 보이는 석재가 흩어져 있으며, 이들 중 한쪽 측면에 ‘한산주’라고 새긴 석재가 있다. 이는 아마도 사람의 이름을 새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절터 아래에 있는 밭에서부터 절터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기와편이 채집되었으며, 특히 197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금당 터로 추정되는 주변에서 나한상(羅漢像)으로 보이는 소조불상의 파편과 ‘가청’이 조각된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나한상 파편의 일부는 현재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기록과 유물·유적으로 미루어 백련암 터는 조선시대에 진천을 대표하는 사찰의 하나였던 길상사 터에 지어진 암자로서, 진천 지역 불교문화를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