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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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烽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집필자 | 박상일 |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북도 진천 지역 관아에서 긴급 상황을 중앙에 전하던 군사 통신 시설.
[개설]
봉수(烽燧)는 사전적 의미로 높은 산정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써 변경의 정세를 중앙에 급히 전달하는 군사 통신 시설을 말한다. 봉수제의 유래를 보면 중국에서는 25~27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이미 상당히 정비된 봉수제도가 있었고,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것은 고려 의종(毅宗) 이후부터이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제는 크게 정비되고 발전된 체제를 갖추게 되었는데, 세종은 집정 초기부터 봉수의 거수(炬數)[擧火數], 봉화군의 정원 등 여러 규정을 정비하고, 연변(沿邊) 봉수의 연대(烟臺) 축조, 봉수망(烽燧網)의 획정 등 체제를 정비 강화하였다.
봉수대에서는 거수를 달리하여 정세의 완급을 나타냈는데, 만약 적침이 있을 때나 안개·구름·비·바람 등으로 봉수에 의해 전달이 불가능할 때 봉수대는 포성(砲聲)[신포(信砲)·발화(發火) 등]과 각성(角聲)[角吹]으로 주위의 주민과 수비 군인에게 급보를 알리고,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리기도 하였다.
봉수는 동서남북의 어느 변경에 위치한 봉수대에서 올린 봉화든지 약 12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봉수 노선별로 봉수 상준처(相準處)의 산명(山名)과 거리 등을 수록하여 이를 관할 지방 관아의 영진(營鎭)으로부터 중앙의 병조·승정원에 소장하도록 했는데, 이는 봉수제도가 그만큼 국가 안보 문제와 직접 연결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화산 봉수]
충청북도 진천군에는 이러한 봉수가 한 곳에 남아 있다. 본래의 명칭은 소흘산 봉수이나 지금은 일반적으로 봉화산 봉수라 불리고 있다. 봉화산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어 온 곳으로 서쪽으로는 문안산성, 북쪽으로는 도당산성이 있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출토 유물의 시대 분포가 고려~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인좌의 난 이후 왕의 특명으로 1731년(영조 7)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옛부터 진천 지역이 지리적·군사적인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