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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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風水地理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집필자 | 김진식 |
[정의]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땅에 관한 이치를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이론.
[개설]
풍수라는 말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뜻의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나온 말이다. 바람을 감춘다는 말[藏風]은 생기가 바람을 만나면 부산(浮散)하므로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득수(得水)란 지중에 수기(水氣)가 있으면 생기가 있고, 생기가 축적되면 지상의 복을 가져오니 득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풍수지리는 후한 말에 성립된 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집터·무덤 같은 것의 방위·지형 등의 환경적 요인이 사람의 화복에 절대적 관계를 갖는다는 학설이다. 모든 재화를 예방하고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지상을 판단하는 이론인데, 지리·지술·감여(堪輿) 등이라고도 한다. 즉 풍수지리는 집터나 마을 터, 도읍 터, 무덤 자리의 좋고 나쁨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일종의 토속적인 운명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을 풍수가·지리가·감여가·음양가·지관 등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설에는 청룡(靑龍)[東, 左], 주작(朱雀)[南, 前], 백호(白虎)[西, 右], 현무(玄武)[北, 後] 등 4방위에 각각의 상징물을 설정하고, 이로써 모든 산천과 당우의 지형·지세·지기·지물 등을 종합적으로 관찰하여 사람의 복리에 합당한 장소를 선정한다.
[풍수지리 사상의 발생]
지하의 정기가 물·바람으로 방해되거나 흩어지지 않는 장소를 선택하여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그 자손이 정기를 받아 부귀수복(富貴壽福)을 누리게 된다고 믿었다. 대지는 능동적으로 만물을 화생시키는 활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생기가 인체와 거주자의 운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므로 풍수의 자연 현상과 변화는 인간의 행복과 직결된다. 풍수지리 사상이 전국시대 말기에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차츰 음행오행설이나 참위설(讖緯說)과 혼합되어 전한시대 말기부터 후한시대에 걸쳐 인간의 운명과 화복에 관한 각종 예언설이 대두되면서 도교의 이론을 받아들여 한층 더 체계화되었다.
우리 문헌의 풍수지리에 관한 첫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탈해왕조(脫解王條)」이다. 이는 왕이 등극하기 전 호공(瓠公)으로 있을 때 산에 올라 현월형(弦月形)의 택지를 보고 속임수를 써서 그 택지를 빼앗았는데 뒤에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백제에서 반월형(半月形) 지형인 부여(扶餘)를 도성으로 삼은 것이나 고구려의 평양 천도가 모두 풍수사상에 의한 것이다.
[풍수지리 사상의 보급]
풍수지리 사상은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도입하여 신라 말기에 활발해졌으며,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맞으면서 조정과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상대마을은 다시 ‘차돌배기’와 ‘강당말’로 구분된다. 옛날 선인들은 이곳이 ‘배나무가 산발적으로 떨어지는 형국’이기에 ‘이화낙지형(梨花落地形)’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강당말을 ‘이화강당말’로 부르게 되었다. ‘상대’란 이름도 차돌배기와 강당말이 집을 짓는데 최고의 명당자리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강당말에서 두촌리 남천마을로 가는 곳을 ‘배나무골’이라 했는데, 이도 이화낙지형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 기지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약 4km 정도 떨어져 초평면 금곡리와 경계를 이룬다. 약 600년 전 마을이 형성될 때 마을 모습이 꼭 베틀 모양을 하고 있었고, 마을 가운데 연못이 있어 길지(吉地)로 알고 마을을 정했다 한다. 따라서 ‘베틀 기(機)’ 자와 ‘못 지(池)’를 써서 ‘기지’라 불렀다 전한다.
[와우형 양촌(陽村)마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의 양촌마을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을 도와 많은 전공을 세운 이영남(李英男)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마을 서편에 묘소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풍수가 두사충(杜思忠)을 시켜, “어디다 진을 치면 이길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두사충이 알려준 곳에 진지를 치고 패하고 말았다. 이여송은 두사충을 처형하려 하였다. 이에 경주이씨 11대손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 이여송에게, “두사충이 일부러 패하게 한 것이 아니고 아군의 전세가 약해서 패한 것이니 두사충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하고 수차 건의하였다. 두사충은 생명의 은인인 이시발에게 보답할 길을 찾다가 그의 묘소를 잡아주었다. 그 묘소가 바로 용정리 지전마을 뒷산이며, 와우형(臥牛形: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었다. 이 묘소에서 앞을 내다보면 시냇물이 흐르고, 건너편에 양지바른 곳이 있었다. 바로 여기가 볕양(陽)자와 마을 촌(村)자를 쓴 양촌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