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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752
한자 李瀷
영어음역 Yi Ik
이칭/별칭 자신(子新),성호(星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생|학자
출신지 평안북도 운산군
성별
생년 1681년연표보기
몰년 1763년연표보기
본관 여주

[정의]

조선 후기 안산에서 활동한 유생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아버지는 이하진(李夏鎭),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대후(權大後)의 딸, 처는 고령신씨(高靈申氏) 신필청(申必淸)의 딸과 사천목씨(泗川睦氏) 목천건(睦天健)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익은 1681년(숙종 7) 10월 18일 아버지 이하진의 유배지인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1682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瞻星里)[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로 돌아와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자라났다. 둘째 형인 이잠(李潛)에게서 글을 배웠다.

25세 되던 1705년 증광시에 응했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았던 탓으로 회시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1706년 형 이잠이 왕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인해 장살(杖殺)되면서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였다. 집 인근에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어서 그의 호도 여기에 연유되었고, 그 고장에 있던 그의 전장(田莊)도 성호장(星湖莊)이라 일컬어졌다. 이익은 여기에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토대로 생활하였다.

35세 되던 1715년에 어머니 권씨마저 여의자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宗家)로 돌려보냈다. 47세 되던 해에 조정에서 학문적 능력을 높이 사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가세는 퇴락되었고, 70세가 넘어서는 일찍이 문과 장원으로 급제해 예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낸 외아들 이맹휴(李孟休)마저 오랜 병고 끝에 죽었다.

그 동안에 가산도 탕진되어 만년에는 한 명의 고노(雇奴) 외에는 송곳을 세울 만한 전지도 없으리만큼 영락하였다.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조정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이익에게 첨지중추부사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 12월 17일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이익은 선현의 언행을 샅샅이 기억하고 일찍부터 시나 문을 잘 외었다. 『맹자(孟子)』, 『대학(大學)』, 『소학(小學)』, 『논어(論語)』, 『중용(中庸)』, 『근사록(近思錄)』 등을 읽고, 다시 『심경(心經)』, 『역경(易經)』, 『서경(西京)』, 『시경(詩經)』을 거쳐 정주(程朱)와 이황의 학문을 탐독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허목(許穆), 윤휴(尹鑴) 등의 뒤를 이어 주자(朱子)에게로만 치우치는 폐풍에서 벗어나 수사학(洙泗學)[공자가 사수(泗水)에서 제자를 가르친 데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원시유학을 지칭함]적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부흥을 기하였다. 또 이이(李珥)유형원(柳馨遠)의 학풍을 존숭해 당시의 사회 실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무(世務)에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재구(材具)의 준비가 있어야만 실학(實學)[진정한 학문이라는 뜻]이라고 보고 사장(詞章), 예론(禮論)에 치우치거나 주자의 집전(集傳), 장구(章句)에만 구애되는 풍조, 종래의 주자학적으로 경화된 신분관, 직업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또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학(西學)에는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여 천문, 역산(曆算), 지리학, 천주교 등에 관련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널리 열람하고 「만국전도(萬國全圖)」, 시원경(視遠鏡), 서양화(西洋畵) 등 서양 문물에 직접 접하면서 세계관, 역사의식을 확대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종래 중국 중심의 화이관(華夷觀), 성인관(聖人觀)에서 탈피해 보다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시야를 지닐 수 있게끔 하였다.

역사관에 있어 다른 일반의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인식을 보였다. 즉 이익은 역사가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파악할 것은 ‘시세(時勢)’, 즉 역사적 추세이며, 시비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 정치적으로 고질화된 당쟁 문제를 해결하고 나라와 사회를 안정시키려면 한편으로 인재 등용의 방법을 고쳐서 문벌이나 당색 중심의 정치를 타파하여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기구를 개편하는 동시에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사치한 소비 생활을 하는 양반들의 생리를 고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신분제적인 사회 구조를 고쳐서 점진적으로나마 노비의 신분을 해방시켜 사농의 합일과 같이 양천(良賤)의 합일도 아울러 주장하여 근대적인 직업관, 신분관에 접근했음을 나타내 준다. 또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덕치(德治)로써 인정(仁政)을 베풀어야 한다는 본원적인 유교정치를 지표로 삼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17세기 이래 조선의 사회 변동에 따른 개혁을 지향하였다.

특히 토지제도에서는 전지 측량을 철저히 하여 호세가(豪勢家)에 의한 전지광점(田地廣占)을 막기 위해 전지 점유를 제한하는 이른바 한전법(限田法)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 나라에서 일가(一家)의 기본수요전적을 1결(結)로 정해 이것을 한 가호(家戶)의 영업전(永業田)으로 삼자고 하면서 그 이상의 전지를 차지한 자에게는 자유 매매를 허용하되 그 이하의 점유지에 대해서는 매매를 엄금하며 일체의 전지 매매는 관청에 보고해 관에서 전안(田案)을 비치하고 문권을 발급해 법적 보증이 되게끔 관리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익은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한다면 현재의 점유 전지를 줄여서 빼앗거나 더 주지 않더라도 전지 점유는 균등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전지를 많이 차지한 자는 그들의 자손에 의해 분점(分占)되거나 혹은 불초한 자의 파락(破落)으로 말미암아 여러 세대가 지나면서 전지가 줄어 평민과 균등하게 되는 반면 빈농의 전지 매각을 금하면 호세가의 토지 겸병이 불가능하고 빈민은 지혜와 힘을 다해 절검과 증식에 노력한다면 조금씩이라도 전지를 사서 제한량까지는 늘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또 이를 위해서는 십일세법(什一稅法)의 원칙을 엄수해야 하고 불법적인 징수를 억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기타 형정의 병행을 주장하거나, 정치 기강의 확립을 위해 의정부의 기능을 복구할 것, 능력 본위의 인사 시행, 병농일치 및 양천합일(良賤合一)에 의한 향병제(鄕兵制)의 확립 등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익의 학문은 가문의 후손들에게 이어져 많은 준재가 배출되었다. 아들 이맹휴는 『예론설경(禮論說經)』, 『춘관지(春官志)』, 『접왜고(接倭考)』 등을 남겼고, 손자 이구환(李九煥)은 조업(祖業)을 계승하였다. 그 위에 종자(從子) 이병휴(李秉休)는 예학(禮學)으로, 종손(從孫) 이중환(李重煥)은 인문지리로 이름을 남기고, 이가환(李家煥)정조의 은총을 받아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천주교를 신앙해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때에 옥사하였다. 이밖에도 문인으로 윤동규(尹東奎), 신후담(愼後聃), 안정복(安鼎福), 권철신(權哲身) 등이 있어 당대의 학해(學海)를 이루어 그 흐름이 정약용(丁若鏞)에게까지 미쳤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성호사설(星湖僿說)』, 『곽우록(藿憂錄)』,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 『사칠신편(四七新編)』, 『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 『사서삼경질서(四書三經疾書)』, 『근사록질서(近思錄疾書)』, 『심경질서(心經疾書)』, 이황의 언행록인 『이자수어(李子粹語)』 등이 있다. 문집의 경우 일차적으로는 1917년에 간행된 50권 27책의 퇴로당본(退老堂本)과 1922년에 간행된 70권 36책의 모렴당본(慕濂堂本)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67년(고종 4) 우의정 유후조(柳厚祚)의 건의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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