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437
한자 朝鮮時代
영어음역 Joseonsidae
영어의미역 Jos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근호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경기도 안산의 역사.

[개설]

안산 지역은 고려 940년(태조 23) 이래 ‘안산’이라는 지명이 사용된 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이숙번 등에 의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지역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반월신도시 개발과 반월공단, 고잔신도시 조성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정치]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 경기도가 좌·우도로 분리될 때 안산군은 장단(長湍)·임강(臨江) 등과 함께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이후 안산이라는 지명이 계속 존속되는 가운데,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로 재편성할 때 경기도에 속하였다. 지방관으로는 종4품의 군수와 정9품의 훈도가 설치되었다. 이후 필요에 따라 이속(吏屬) 등이 추가로 설치되었으니, 고종 때에 간행된 『경기읍지』에 의하면 군수 밑에 좌수 1명, 별감 1명, 장교 1명, 아전 21명, 지인 9명, 관노 9명, 사령 1명, 관비 1명, 면주인 1명 등 이서직까지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안산은 동쪽으로 금천에 이르기까지 1리, 서쪽으로 바다까지 30리, 남쪽으로 광주 성곶[소리곶]까지 11리, 북쪽으로 부평까지 10리로서 수원도호부 소속이었다. 이후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동쪽으로 과천현 경계까지 5리, 남쪽으로 남양부 경계까지 35리, 서쪽으로 인천부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 금천현 경계까지 14리이며 서울까지는 51리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이런 기록의 차이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편찬 이후 어느 시기에 관아가 이전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단정할 수 없다.

안산군은 별호를 연성(蓮城)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1467년(세조 12)부터 연성이라는 별호를 사용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1463년(세조 9) 금천 지역의 농법을 전하는 『금양잡록(衿陽雜錄)』의 저자 강희맹(姜希孟)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전당(錢塘)에서 연꽃씨를 받아와서 안산의 관곡지(官谷池)[시흥시 하중동]에 시험 재배하면서 비롯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들 두 견해보다 앞선 시기인 태종 때 좌리공신 4등에 책록된 김정경(金定卿)의 봉호가 연성군(蓮城君)이었다는 점은 지금까지의 견해의 제고를 요한다. 대개 봉호는 본관지나 그곳의 별칭이 붙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안산은 한때 수원부에 속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정조가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자주 행차하면서 인근에 있는 금천·과천과 아울러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797년(정조 21)에는 안산군의 아헌(衙軒)에서 행행시사(行幸試士)가 실시되기도 했다. 18세기에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안산의 행정구역으로 군내면·잉화면·대월면·미리면·마유면·초산면 등이 나타나고 있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전문 6조의 칙령 98호에 의해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시흥현은 시흥군, 과천현은 과천군으로 개편되면서 시흥·안산·과천의 3개 군은 인천부에 예속되었다. 이어서 반포된 칙령 164호에 따라 안산·시흥·과천의 3군은 5등군이 되었으며, 군수의 연 봉급은 600원이 되었다. 1906년 칙령 49호에 따라 광주군의 성곶(聲串)·월곡(月谷)·북방(北方)의 3개면이 안산군에 이속이 되어 안산은 6개면에서 9개면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군내면을 포함한 안산군은 일제에 의해 1914년 대대적인 행정개편이 이루어졌다.

[군사제도]

『세종실록지리지』 안산군조에 보면 안산의 군사제도로, 당시 안산군 서남쪽에 초지량만호(草芝梁萬戶)라 하여 수군만호 1명이 있었다고 한다. 배는 모두 9척으로 이 중에 중대선이 5척, 무군선(無軍船)이 4척 있었고, 수군은 623명으로 그 중에 장번 수군이 8명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수군만호영이 있었으나 갯벌이 밀려와 대형 선박의 출입이 불가능하자 사곶(沙串)으로 영을 옮겼다가, 다시 출입이 가능해지고 소릉(昭陵)을 수비해야 하였기에 종전의 자리에 영을 두었다. 1656년(효종 7)에 초지진(草芝鎭)을 강화도로 옮겼는데 안산의 초지진을 일초지(一草芝), 강화도의 초지진을 이초지(二草芝)라 불렀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미 안산의 초지진은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경제]

경제 상황과 관련해서 조선 전기 『세종실록지리지』 단계에서 안산군의 호수는 302호, 인구는 588명이었고, 간전(墾田)이 2,289결이었으며, 그 중 논이 9분의 3이나 되었다. 또한 군민들은 어염으로 생계를 삼았고 토산품은 오곡·팥·메밀·삼[마] 등이 있었다. 특히 어업과 관련해서 안산은 5개 어량에서 13종류의 어류를 포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것은 물고기의 수확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알 수는 없으나, 그만큼 안산 연안의 어족이 풍부함을 알 수 있다.

풍부한 어족 자원 때문에 정부의 수탈도 심하였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안산현이 병자호란 이후 부역을 지는 토지가 330결이었는데 사옹원(司甕院)에서 어살을 설치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어살로 부역을 면제받는 토지가 300결이고, 나머지는 30결에 불과하다. 군수 이문헌(李文憲)이 어살을 치는 재물로 쌀을 거두고 그것으로 물고기를 사서 바치려 사옹원에 진정했다가 파면당하는 일까지 발생할 정도였다.”고 하였다. 안산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해산물이 진공되었고, 이의 관리를 위해 사옹원 분원의 어소(魚所)가 설치되었다. 어소에는 정7품관인 2인의 직장 중 1인이 상주하며 이를 관리하였다.

이후 1759년(영조 35)에 간행된 『여지도서』에서는 간전 427결 7부[원결 수 603결 55부 4속 중 각종 면세전·진전을 제외한 수], 수전 217결 28부 9속[원결 수 510결 47부 7속]으로 기록되었다. 『여지도서』 이후 약 100여 년 뒤에 만들어진 『경기읍지』에서는 안산군·시흥군·과천현의 전답 총 결 수를 각각 693결 14부 8속, 727결 37부 7속, 833결 72부로 기록하고 있어 시흥군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총 전결 수가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통과 통신]

안산의 교통제도와 관련해서는 석곡역(石谷驛)쌍록원(雙鹿院)이 있었다. 석곡역은 군의 치소에서 서쪽 7리 지점에 있었고, 인천의 중림도에 속하였으며 역마 8필, 노비 33명이 있었다. 쌍록원은 군의 치소[시흥군 수암리]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위치하였다. 이밖에도 점막(店幕)이 초산면 광석리에 있는데, 읍에서 10리 지점에 설치되었다.

봉수의 경우 안산은 제5거선 선상에 있었다. 제5거는 전라도 순천 방답진에서 출발한 신호가 경기도에 들어와 양성·수원·남양의 해운산을 거처 안산의 무응고리(無應古里)·오질애(烏叱哀)[오이도]에 이르며, 이는 다시 부평을 지나 양천 개화산에서 한양 목멱산에 전달되었다. 안산에는 “군의 서쪽에 오질애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무응고리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인천의 성산에 응한다. 무응고리는 군의 서쪽에 있으며 남으로는 남양 해운산에 응한다.”라고 하여 2개의 봉수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응고리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무응고리 봉수가 『여지도서』에서 보이는 정왕산(征往山) 봉수라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무응고리를 지금의 군자면 정왕리 봉우재의 봉화산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오질애와 해운산 간의 도서 또는 해안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문화]

안산의 문화는 조선 초에는 이숙번이나 강희맹 등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후 18세기에 이르면 회화에서 강세황이나 김홍도 등이 등장하여 회화 발전을 주도하였고, 문학에서는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안산15학사가 등장하며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안산15학사는 이용휴(李用休)·신택권(申宅權)·이광환(李匡煥)·유경종(柳慶種)·강세황(姜世晃)·조중보(趙重普)·이수봉(李壽鳳)·최인우(崔仁祐)·유중림(柳重臨)·허필(許泌)·임희성(任希聖)·안정복(安鼎福)·목만중(睦萬重)·채제공(蔡濟恭)·신광수(申光洙)·엄경응(嚴慶膺) 등을 꼽는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