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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641
한자 墨鄕安山
영어의미역 Ansan, The Home of India Ink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영의

[개설]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한때 묵향(墨鄕)으로 불린 곳이 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이다. 조선시대 안산군 군내면 부곡리(釜谷里)와 신리(新里)에 속해 있던 부곡동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부곡리로 통합되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부곡동이 되었다.

부곡동은 2009년 6월 30일 현재 총 8,403가구에 22,152명[남자 11,331, 여자 10,821]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행정구역은 36개통 141개 반에 이른다. 안산시 동부 외곽 지역에 위치하여 수인산업도로와 영동고속국도·서해안고속국도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넓고 길게 조성된 성호공원과 단원조각공원이 동네 앞에 조성되어 있고, 수리산 자락이 넓게 동네를 감싸고 있는 전원적인 주거 지역이다.

[기호남인의 대표 문중 진주유씨 가의 터전으로 우뚝 선 부곡동]

부곡동은 원래 진주유씨 누대의 세거지로 개멸·벌터·새마을·시랑골·신촌·옹기마을·정재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의 시랑골·신촌 등은 폐동되어 새로운 주택과 양궁경기장·제일스포츠센터 등이 들어섰고, 개멸·벌터 등 북부 지역은 예전의 자연 취락을 유지하고 있지만 안산~신갈 간 고속국도가 마을 중앙을 관통하고 있다. 안산시가 발전함에 따라 1991년 11월 18일 안산시 조례 제416호에 의거, 와동에서 월피동으로 분동이 되었으며, 1995년 3월 2일 안산시 조례 제605호에 의거하여 월피동부곡동으로 분동이 되었다.

부곡동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온 진주유문(晋州柳門)은 조선 후기 기호(畿湖) 남인 3대 가문인 목래선(睦來善)의 사천목씨(四川睦氏)와 민희(閔熙)·민암(閔黤)의 여흥민씨(驪興閔氏)와 더불어 안산 지역에서는 대표적인 가문이다.

진주유씨 대종가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된 청문당(淸聞堂)은 삼척부사를 지낸 수촌(水村) 유시회(柳時會)[1562~1635]가 손수 조영한 것이라 한다. 본디 충청북도 괴산에서 살아오던 유씨 집안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유시회의 조카인 유적(柳頔)[1595~1619]이 선조(宣祖)의 아홉째 딸인 정정옹주(貞正翁主)의 부마로 뽑힌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정혼을 하고 혼인에 이르기 전 유적의 아버지 유시행(柳時行)이 사망하자, 어린 사위가 3백 리가 넘는 길을 오갈 것을 걱정한 선조가 한양에서 1백 리 안쪽에 묘를 잡으라는 명을 내려서 묘지를 부곡동 새터에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진주유문은 선조로부터 받은 넓은 사패지(賜牌地)와 안산 바닷가 어염권을 기반으로 이곳에 세거해 왔으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유적이 선조의 부마가 된 데 이어 조카 유명견(柳命堅)[1628~1707]·유명천(柳命天)[1633~1705]·유명현(柳命賢)[1643~1703] 등 3형제가 판서에 오르는 등 한때 진주류문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유명천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94년(숙종 20)의 갑술옥사(甲戌獄事), 1701년(숙종 27) 신사원찬(辛巳遠竄) 등 세 차례에 걸쳐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또한 신사년 원찬 때는 경기감사 유명견이 위도(蝟島)에, 이조판서 유명현이 남해도(南海島)에 각각 절도안치(絶島安置) 되는 등 정치적 박해를 받다가, 이 중 유명현이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유명천청문당(淸聞堂) 인근의 경치를 읊은 시 「하당팔영(荷堂八詠)」 여덟 수를 남겼으며, 이산해(李山海)의 고손녀로 유명천의 아내가 된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는 계속되는 남편의 유배 생활과 출산의 실패 등 고초들을 한글 필사본으로 쓴 『고행록(苦行錄)』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경기도 전통명가로 꼽히는 경성당(竟成堂)진주유씨 가의 21세손이자 차종손인 유신(柳賮)[1748~1790]의 아들 유중서(柳重序)[1779~1846]가 둘째 아들 유방(柳霶)[1823~1887]이 살림을 날 때 지어 준 집이라고 한다. 안산문화원장을 지낸 고 유문형(柳文馨)에 따르면, 안채는 2백여 년 전에, 그리고 사랑채는 그보다 30여 년 뒤에 지어졌다고 한다. 집터에 대해서 따로 전해지는 말은 없으나, 풍수사인 오 아무개가 “수십 대를 이어가면서 보전해야 할 자리다. 재벌 정 아무개의 재산과 바꾸어도 아까울 만큼 좋은 자리다.”라는 극찬을 남겼다고 한다.

경성당의 누마루에 걸린 3개의 주련에는 “높은 산 화모봉 아래 빗살처럼 모여 사는 한 가문, 이들이 사는 깊은 골 부곡 마을에는 집들이 솥발처럼 들어섰구나[山高華帽峰下居 簪纓之族村深覆 釜谷中有鐘鼎之]”와 “선조께서 내려주신 땅, 한 줌이라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宣廟賜牌之局 寸土勿與於他人]”, “성조[14조인 성산공(星山公)]께서 터를 잡으신 곳이니 후세까지 보전해 나가라[星祖定礎之基十世相傳于後裔]”라는 글이 있는데, 이런 글에서도 알 수 있듯 아직도 진주유씨 종손이 자부심을 지니며 거주하고 있다.

현재 상록구 부곡동 산50~40번지에는 진주유씨 가의 선영(先塋)이 있으며, 유적과 정정옹주의 묘소[안산시 향토유적 제14호]를 비롯한 여러 분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진주유씨 가의 분묘 위치를 상세하게 그려 놓은 것이 「부계전도(釜溪全圖)」로, 안산시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계전도」유명천의 6세손으로 구한말 개천군수를 지낸 모산(帽山) 유원성(柳遠聲)[1851~1945]이 그렸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4대 만권당의 하나-청문당]

진주유씨 대종가인 청문당에는 1만 권의 서책이 저장된 만권루(萬卷樓)가 있어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고택과 이인엽(李寅燁)·이하곤(李夏坤) 부자의 회와재(晦窩齋), 유명현(柳命賢)경성당(竟成堂)과 더불어 조선 후기 4대 만권당으로 꼽히기도 했다.

청문당은 16,529㎡의 대지 위에 현정(玄亭)·하당(荷堂)·희한당(凞閑堂)·만권루 등의 부속 건물과 괴석원(怪石園) 등 정원이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만조가 되면 정원 밖으로 배를 띄울 수 있게 조영된 청문당의 실경을 그린 표암 강세황(姜世滉)[1713~1791]의 「지상편도(池上篇圖)」가 처가인 유씨 가문과 진주강씨 본댁에 각각 1점씩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 청문당의 만 권에 이르는 서책에 대해서는 “원컨대 유감사 댁 서고의 좀벌레가 되어 만 권 서를 배불리 먹고 싶네[公嘗貯萬卷詩書 伊時童謠 願爲柳監司宅魚 飽食萬卷書 野史載之]”라는 표현이 시중에 떠돌 정도였다고 한다. 유씨 집에서 책을 빌려갔던 이들 중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는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91]도 있었다.

만 권의 책 말고도 청문당 하면 사람들의 입에 자연스레 오른 것이 별미로 담그는 특미 가양주인 노가주(露柯酒)였다. 피나무와 찹쌀을 원료로 하여 이슬을 맺히게 하여 담그는 이 술은 궁중에서만 전래되는 것으로, 유석의 사촌형인 진안위 유적 댁에 전수된 명주(名酒)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선조의 아홉째 딸인 정정옹주(貞正翁主)가 하가(下稼)해 올 때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강세황의 처남인 해암(海巖) 유경종(柳慶種)[1714~1784]은 조선 후기 안산의 문화를 꽃피운 주역이었다. 현 정재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오교촌장(午橋村莊)의 주인이었던 유경종은, 안산 일대의 넓은 사패지(賜牌地)와 일찍이 선조로부터 하사받은 바닷가의 어염권에 의하여 축적된 자산을 이익(李瀷)[1681~1763]의 문하에 대한 지원과 ‘안산15학사’의 창작 공간으로 쾌척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의학에 조예가 깊어 유의(儒醫)로 칭송 받던 유경종은 매부인 강세황, 지기인 안정복과 함께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청문당에서 10리 떨어진 성촌의 성호장(星湖庄)에 출입하였다. 특히 안정복이 70여 세 때 한 짐의 서책과 손녀의 혼수에 쓸 가마와 말을 빌려 달라고 할 정도로 유경종안정복은 가까운 사이였다.

유경종은 말년에 청문당을 중심으로 ‘오천시사(午川詩社)’를 결성하였는데 경향 각지의 많은 문인과 묵객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한여름의 복날에는 청문당에서 개장국 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장면은 표암 강세황의 『현정승집(玄亭勝集)』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 밖에 부곡동의 모임에 대해서는 안정복의 시와 채제공(蔡濟恭)의 시, 그리고 강세황의 시 등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기(記)·서(序)·발(跋) 등에 전한다. 이때 모임의 중심인물은 유경종을 비롯한 이용휴(李用休), 강세황, 임희성(任希聖), 허필(許佖), 유중림(柳重臨), 조중보(趙重輔), 엄경응(嚴慶膺), 이수봉(李壽鳳), 최인우(崔仁祐), 이맹휴(李孟休), 이광환(李匡煥), 채제공, 박도맹(朴道孟), 신택권(申宅權) 등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들은 생활과 교유의 공간을 함께 하는 동지의 특성을 넘어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가치를 존중하는 심교(心交)의 지경에 이르렀다. 대부분 정치적으로 일탈된 인사들이었기에 세속적 욕구를 초탈하였고, 따라서 서로에게 바라는 바가 없었다. 다만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학문과 예술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를 마음으로 인정하는 심교가 가능했다.

1754년 청문당에서 강세황·이용휴·안정복·신광수·유경종·유경용 등이 모여 같은 운(韻)을 써서 연구를 이룬 시 한 편이 유경종『해암고(海巖稿)』에 전하고 있으며, 강세황『표암유고(豹庵遺稿)』에도 같은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이처럼 부곡동청문당성호 이익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안산15학사’의 문예 창작의 중심지였고, 표암 강세황해암 유경종은 예술가들을 부곡동으로 불러 모으는 데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표암 강세황이 빛낸 묵향과 예향]

청문당이 유명해지게 된 데에는 시·서·화 삼절(三絶)로 조선 후기 화원의 대표였던 표암 강세황의 영향이 컸다. 서울 남산에서 태어난 그는 21세 때 진천(鎭川)에 머물던 아버지가 별세하자 3년상을 치렀고, 뒤이어 25세 때 다시 어머니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마쳤다. 그리고 집안이 옹색해지자 32세에 처가가 있는 안산에 들어와 61세로 벼슬에 나갈 때까지 30여 년을 머물렀다.

부곡의 처가와 5리 떨어진 곳[현재의 상록구 수암동으로 추정]에 살았던 강세황은 부인을 잃은 뒤 시와 그림에 능하였던 처남 유경종청문당에서 그림도 그리고 시도 짓고 읊으며 지냈다. 그런데 청문당에서 강세황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을 배운 이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1~1806?]였다. 그때 김홍도의 나이 8~9세로, 강세황김홍도를 귀여워하였고, 김홍도 또한 강세황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청문당은 조선 후기 화단의 대표적 화가인 김홍도와도 인연이 깊은 셈이다.

강세황은 또 수암동 원당골에 우거한 심사정(沈師正)[1707~1769]과 교유하며 수암동 뒤편의 수리산 기슭에 자리한 원당사(元堂寺)에서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그리고 30여 세 위인 이익의 글방을 드나들면서 같은 연배인 이용휴[이익의 조카]와 학문을 논하고 세정(世情)을 이야기하였다.

강세황은 이렇듯 유경종의 도움을 받아 청문당이 위치한 부곡동을 묵향과 예향(藝香)이 가득 찬 공간으로 창출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자부심으로 유원성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부곡동 일원의 8가지 뛰어난 경승을 손수 여덟 폭의 병풍으로 꾸민 것이 『부계팔경도(釜溪八景圖)』이다. 안산시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 『부계팔경도』에는 「모산초적(帽山草笛)」과 「부곡 시냇가의 달빛 속 낚시[釜溪釣月]」, 「숲속 봄날의 꽃비[萬樹花雨]」, 「진벽루의 흰 구름[鎭碧白雲]」, 「지평 뜰에서 들려오는 농군들 노랫소리[芝坪農歌]」,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돛단배[望海歸帆]」, 「우산에 지는 석양[牛山落照]」, 「판천교 다리의 게잡이 불빛[板川蟹火]」 등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산의 전통주로서 손색이 없을 노가주의 맥도 끊기고, 그 옛날 기호 남인의 학문적 기반으로 명공거관(名公巨官)들이 제 집인 양 드나들며 매화나무 늙은 등걸 밑에서 만 권의 책과 함께 시·서·화를 벗삼아 매화음(梅花吟)을 즐겼던 조선의 4대 만권당(萬卷堂)으로 불리던 청문당도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다만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부곡동 역시 근대화와 산업화의 개발에 밀려 더 이상 옛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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