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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107
한자 孝子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집필자 김두헌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으로서 부모 및 시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섬긴 인물.

[개설]

조선 시대를 지배한 사상은 유교였다. 유교 사회에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가장 중요한 도덕 덕목으로 손꼽았다. 조선 사회에서의 유교의 영향력은 같은 시기의 중국의 명과 청 사회나,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나 에도 막부 사회보다 강력하였다. 가장 유교적인 사회가 다름 아닌 조선이었다. 삼강오륜이라고 할 때의 삼강(三綱)은 충, 효, 열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삼강인 충, 효, 열을 가장 중요한 도덕 덕목으로 여겼기에, 그것을 실행한 행적이 다른 사람에 비해 두드러지게 달라 모범이 될만한 사람들을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창하였다.

[군산 지역의 효자]

조선 시대 군산 지역[옛 옥구현임피현]에서도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충신, 효자, 열녀에 대한 포창이 실시되었다. 효자와 열녀는 해당 고을 사림이 그 사실을 확인한 이후 이들을 해당 도에 추천하면, 도에서는 다시 이를 확인하고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다시 이 사실을 확인하고 조사하여 마침내 효자와 열녀로서 정려(旌閭)를 내리거나, 복호(復戶), 포상(襃賞), 증직(贈職) 등의 상훈을 내렸다. 군산 지역 효자와 열녀 중에서 그 행적이 두드러지게 뛰어나 조선 조정으로부터 정려(旌閭)를 받거나, 복호(復戶)의 포상을 받거나, 일제 강점기에 유림들에 의해 효자비나 열녀비가 건립된 자들을 선별하여 기록하였다[이 외에 효행이나 열행으로 각 현이나 도로부터 포창을 받은 경우도 많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들은 모두 30여 명인데,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88년(고종 25)에 정부에서 명정(命旌)하고 1931년에 효자비가 건립된 강계팔(姜啓八)의 처(妻) 두릉 두씨(杜陵杜氏), 1888년(고종 25)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1931년에 효자비가 건립된 강원덕(姜元德), 1888년(고종 25)에 명정(命旌)하고 1931년에 효자비가 건립된 강응원(姜應元)강영무(姜永武) 부자, 1925년에 대성교숭포부(大成敎崇褒部)에서 일가 삼효비(一家三孝碑)를 건립한 고동옥(高東沃)의 처(妻) 탐진 최씨(耽津崔氏)탐진 최씨(耽津崔氏)의 두 아들 고두환(高斗煥)과 고명환(高明煥) 형제, 1990년에 부부 효열비가 건립된 고병기(高炳箕)와 처(妻) 평강 채씨(平康蔡氏), 1931년에 부부 효행비가 건립된 고병성(高炳星)과 처(妻) 두릉 두씨(杜陵杜氏), 1904년(광무 8)에 대한제국 정부에서 명정(命旌)한 고제룡(高濟龍), 1942년에 효열비가 건립된 김권추(金權秋)의 처(妻) 남평 문씨(南平文氏), 1878년(고종 15)에 정려가 건립된 김보순(金輔淳)과 처(妻) 담양 전씨(潭陽田氏), 1888년(고종 25)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1901년(고종 38)에 효자비가 건립된 김장옥(金章玉)과 처(妻) 제주 고씨(濟州高氏), 1935년에 효자비가 건립된 두건표(杜建杓)의 처(妻) 평산 신씨(平山申氏), 1528년(중종 23)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이듬해 1529년(중종 24)에 효자비가 건립된 두세준(杜世俊), 1869년(고종 6)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한 두안복(杜安復), 1889년(고종 26)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1951년에 효자비가 건립된 두재하(杜在夏)의 처(妻) 남평 문씨(南平文氏), 1887년(고종 24)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한 문덕중(文德中)의 처(妻) 전주 이씨(全州李氏), 1905년(광무 9)에 대한제국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1938년에 정려(旌閭)가 건립된 문명로(文鳴魯)의 처(妻) 장흥 오씨(長興吳氏), 1938년에 부부 효행비가 건립된 문몽상(文夢尙)과 처(妻) 남원 양씨(南原梁氏), 1893년(고종 30)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한 문정학(文正學)의 처(妻) 진주 강씨(晋州姜氏), 1923년에 효자비가 건립된 문한규(文漢奎)의 처(妻) 제주 고씨(濟州高氏), 1795년(정조 19)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이듬해 효자비가 건립된 문흥주(文興周), 1870년(고종 7)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이후 효자비가 건립된 문희석(文希奭)문계인(文啓仁)[문희석의 증손], 1928년에 부부 효행비가 건립된 박동표(朴東表)와 처(妻) 여산 송씨(礪山宋氏), 1930년에 효열비가 건립된 서상명(徐相明)의 처(妻) 순천 박씨(順天朴氏), 1889년(고종 26)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한 신택주(申宅柱)와 신대식(申大直) 부자, 1939년에 효열비가 건립된 신의균(申義均)의 처(妻) 남평 문씨(南平文氏), 1703년(숙종 29)에 복호(復戶)가 내려지고 1924년 정려가 세워진 전극추(田克秋)의 처(妻) 제주 고씨(濟州高氏), 1944년에 효열비가 건립된 전만배(田萬培)의 처(妻) 남평 문씨(南平文氏), 고을 유림들이 효열비를 건립한 전병갑(田炳甲)의 처(妻) 평산 신씨(平山申氏), 1944년에 효열비가 건립된 전병순(田炳淳)의 처(妻) 남평 문씨(南平文氏), 효자비가 건립된 전상룡(田相龍), 1932년에 효자비가 건립된 전수일(田壽日)의 처(妻) 가평 이씨(加平李氏), 1724년(경종 4)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1725년(영조 1)에 열녀비가 건립되었으며 1946년에 비석이 재건립된 전시번(田時蕃)의 처(妻) 원주 원씨(原州元氏), 1889년(고종 26)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효열비가 건립된 전익성(田益成)의 처(妻) 남평 문씨(南平文氏), 1892년(고종 29)에 조선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1970년에 효자비가 건립된 채기영(蔡基永), 1899년(광무 3)에 대한제국 정부가 명정(命旌)하고 1927년에 효자비가 건립된 채동구(蔡東九), 1941년에 유회포창사에서 효열비를 건립하도록 권장한 채동진(蔡東震)의 처(妻) 우주 황씨(紆州黃氏) 등이다.

[의의와 평가]

군산 지역에서의 효자에 대한 표창은 조선 전기 이래 해방 이후 일정한 시기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것은 그만큼 위의 시기에 유교 문화 안에서 효라는 유교 덕목이 사회적인 가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왔음을 나타내 준다. 특히 군산 지역에서 효자에 대한 표창이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에 그 어느 시기 보다 두드러지게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외세의 침략과 일제의 통치에 반대하며 우리 고유의 전통을 지키려는 군산 지역 유학자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판단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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