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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745
한자 柳慶種
영어음역 Ryu Gyeonjong
이칭/별칭 류경종,덕조(德祖),해암(海巖),안산십오학사(安山十五學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인
성별
생년 1714년연표보기
몰년 1784년연표보기
본관 진주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조(德祖), 호는 해암(海巖).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유명현(柳命賢), 아버지는 성균진사였던 유뢰(柳耒), 어머니 사천목씨(泗川睦氏)로 목임일(睦林一)의 딸이다. 유경종의 가문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남인계 가문으로 조부대의 유명천(柳命天), 유명현, 유명견(柳命堅), 유명전(柳命全)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과 1694년(숙종 20)의 갑술환국 이후 정치적으로 실세하였다.

[활동사항]

유경종은 1728년(영조 4) 숙부 유래(柳徠)이인좌(李麟佐)가 일으킨 무신란에 연루되어 장살되었을 때 아버지 유뢰 역시 연루되어 해남(海南)에 유배되자 유배지에 따라갔다가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부친상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나마 입지가 좁았던 관로 진출에서 유경종 가문은 더더욱 곤란을 겪게 되었다.

무신란 이후 4년 뒤에 온 집안이 한양을 떠나 안산의 향저로 낙향하였는데 19세부터 21세까지는 경향간(京鄕間)을 왕래한 뒤에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단념하였다. 27세 무렵에 송도를 유람하고 돌아온 것이 그나마 먼 거리 여행이었을 뿐 유경종은 안산권을 벗어나지 않았다. 56세에 모친상을 당해 4년간, 63세에 영조의 국상을 당해 1년간 저술을 폐했던 일 이외에는 내내 안산에 거주하며 독서와 시문 창작에 전념하였다. 유경종은 평소 부모에게 효도를 다했다.

[학문과 사상]

유경종은 조부대에 형성된 청문당(淸聞堂), 경성당(竟成堂) 등에 소장된 많은 서적을 통해 독서 범위가 매우 넓었고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서당에서 학문과 예절을 배우며 안산 일대의 남인, 소북(小北) 문인들과 교류하는 등 학문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재야 학인으로 성장하였다. 유경종의 문학은 문장재도론(文章載道論)의 관점을 문학의 출발점으로 상정하고, 여기에 육경(六經) 중심의 상고적인 문학관과 남인 계열을 추숭한 계통의식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유경종은 매우 신중하고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로 주변 인사와의 교류가 제한적이었으며 따르는 이도 많지 않았다. 함께 교유한 이용휴(李用休), 이광환(李匡煥), 강세황(姜世晃), 조중보(趙重普), 이수봉(李壽鳳), 최인우(崔仁祐), 엄경응(嚴慶膺), 유중림(柳重臨), 허필(許佖), 임희성(任希聖), 안정복(安鼎福), 목만중(睦萬中), 채제공(蔡濟恭), 신택권(申宅權), 신광수(申光洙) 등과 ‘안산십오학사(安山十五學士)’로 불렸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해암고(海巖稿)』가 있다. 문집에 실린 4,000여 수의 시를 통해 유종경은 자신이 살고 있던 안산 지방의 삶과 풍속을 시화함으로써 기속시인이 보여 주었던 사실성과 비판성을 획득하였고 또 형식에 있어 이전에는 쉽게 보이지 않았던 파격과 해학으로 우리나라의 한시가 나아갈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기도 하였다. 또 연작(連作)의 활용과 파격적인 양식을 통해 한시의 규범적 한계를 벗어나 자유로운 시 정신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시의 주제는 자연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시각의 전환을 의도하였고, 시국과 사회상의 비판, 일상쇄사와 주변 인물에 대한 관찰, 재야 사인으로서의 견문 등 제재의 범위를 최대화하였다. 또 시적 표현 면에서는 마음 가는 대로의 시 쓰기를 구사하여 형식에 매이지 않는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 『안산시사』 (안산시사편찬위원회, 1999)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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