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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708
한자 蔡濟恭
영어음역 Chae Jaegong
이칭/별칭 백규(伯規),번암(樊巖),번옹(樊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실학자
출신지 충청남도 청양군
성별
생년 1720년연표보기
몰년 1799년연표보기
본관 평강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안산에서 활동했던 문신이자 실학자.

[가계]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고려시대 경평공(景平公) 채송연(蔡松年)을 시조로 하여, 효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채유후(蔡裕後)의 방계 5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채시상(蔡時祥)이고, 할아버지는 시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던 채팽윤(蔡彭胤)의 형인 채성윤(蔡成胤)이다. 아버지는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던 지중추부사 채응일(蔡膺一)이며, 어머니는 이우당(二憂堂) 이만성(李萬成)의 딸이다.

[활동사항]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15세인 1735년(영조 11)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영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53년(영조 29) 충청도 암행어사로 균역법의 폐단과 변방 대비 문제를 상소하였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의 공로로 승정원동부승지가 제수되었고, 1758년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이 해에 사도세자에게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철회시켰는데, 훗날 영조정조에게 이러한 채제공을 두고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며 너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 1767년(영조 43)부터 홍문관제학·한성부판윤을 거쳐, 1770년부터는 병조판서·예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77년 정조 등극 이후 왕의 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하였다. 사노비절목은 1801년(순조 1) 사노비를 혁파하는 기초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과격한 주장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8년 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788년(정조 12) 다시 우의정에 특채되었다. 이때 첫째 황극(皇極)을 세울 것, 둘째 당론을 없앨 것, 셋째 의리를 밝힐 것, 넷째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다섯째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여섯째 권력 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1791년(정조 15)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책을 관철시켜 특정 상인들만이 특혜를 누렸던 상업 활동을 폐지하고, 일반 영세 상인들도 상행위를 통해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경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1793년 영의정이 되었을 때는 지난날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한 일을 두고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채제공은 특히 혼자서 정승 직책을 겸임한 독상(獨相)을 몇 년간 맡은 뛰어난 정치가이었으며, 수원성을 축조할 때는 정약용(丁若鏞)과 함께 큰 공헌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당시 안산은 노론(老論)과 당쟁을 피해 은거한 남인(南人)과 소북(小北)계 문인, 학자들의 중요한 활동처였다.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조카이자 당시 문단의 거장인 이용휴(李用休)[1708~1782],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1713~1791]과 허필[1709~1768], 강세황의 처남이자 안산 문화계의 구심점이 되었던 진주유씨 유경종(柳慶種)[1714~1784]과 그의 수많은 친구들이 당시 안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유경종은 조부인 이조판서 유명현(柳命賢)[1643~1703]의 고향집[지금의 부곡동]을 물려받아 오교장(午橋莊)을 마련하여 안산 문화계의 사랑방을 제공하였다. 채제공유경종의 오교장에 드나들었던 내로라 하는 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학문과 사상]

문장은 소(疏)와 차(箚)에 능하였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李敏求)·허목(許穆), 아래로는 정약용으로 이어진다. 또한 학문의 적통(嫡統)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李滉)에게 시작하여 정구(鄭逑)허목을 거쳐 이익(李瀷)으로 이어진다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양명학·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였으나, 이러한 사상도 수기치인(修己治人)적인 측면에서는 포용하고자 하였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불교의 별파로서, 이적(夷狄)인 청나라 문화의 말단적인 영향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서학 신봉자에 대해 역적으로 다스리라는 요구를 당론이라 배척하였고, 정조의 뜻을 받들어 척사(斥邪)를 내세우면서도 교화 우선 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한편, 상업 활동이 국가 재정에 필요함을 인식했으나, 전통적인 농업 우선 정책을 지켰다. 또한 사회 안정을 위해서는 사족(士族) 우위의 신분 질서와 적서(嫡庶)의 구별을 엄격한 의리로서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영조 연간 남인청류(南人淸流)의 지도자인 오광운(吳光運)강박(姜樸)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蔡彭胤)이덕주(李德胄)에게서 시를 배웠다. 친우로는 정범조(丁範祖)·이헌경(李獻慶)·신광수(申光洙)·정재원(丁載遠)·안정복(安鼎福) 등이 있으며, 최헌중(崔獻中)·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 등이 채제공의 정치를 이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번암집(樊巖集)』59권이 전하는데, 권두에 정조의 친필 어찰 및 교지가 수록되어 있다. 『열성지장(列聖誌狀)』·『경종내수실록』·『영조실록(英祖實錄)』·『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역북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순조유태좌(柳台佐)가 충청남도 청양군에 영각(影閣)을 세웠고,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채제공·홍가신(洪可臣)·허목을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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