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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472
한자 瓦里-
영어음역 Wariphungmulnori
영어의미역 Farmers Festival Music and Dance of Wari Village
이칭/별칭 동작리두레풍물놀이,와상농악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집필자 김지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놀이
관련단체 안산문화원 지도보기

[정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풍물놀이.

[개설]

와리풍물놀이는 다양한 역할을 맡은 춤꾼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놀이꾼이 서로 어울려 몸동작이나 진을 구성하며 노는 놀이와 연희이다. 이를 ‘동작리두레풍물놀이’, ‘와상농악(瓦上農樂)’이라고도 한다. 와리풍물놀이의 의상은 민복이라 부르는 흰 바지저고리에 남색 조끼를 입는데, 행전을 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상쇠를 비롯한 모든 쇠잡이는 상모를 쓰는데 북상을 쓰고, 뒷잽이[치배]들은 나비상을 쓴다. 버꾸잽이는 상모 채상을 쓰고, 무동은 노랑 저고리에 빨강 치마와 남색 쾌자를 입고 빨간 띠는 허리에, 청색·노랑 띠는 가위표로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 묶는다. 잡색으로 나오는 샌님은 흰 도포에 뿔관을 쓰고 담뱃대와 부채를 든다.

[연원]

와리풍물놀이는 조선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았다. 조선 후기 경복궁 재건 당시 와상리 노역부대(勞役部隊)는 큰 깃발을 앞세우고 풍물가락에 힘을 돋우며 신명나게 일을 했다. 대원군이 이를 보고 크게 치하하여 친필 농기와 농악기를 하사했다. 그 후 와상리 두레 농기는 양반기 대접을 받았고, 선생 두레로 불려 다른 마을의 두레와 마주치면 세 번 반의 인사를 받고 두 번 반의 답례를 했다고 한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제강점기 말에는 두레풍물놀이의 활동은 거의 중단되었다. 해방 후 1950년대에는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1960년대 이후 활동이 점차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1986년 박해일[75세,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기능보유자]에 의해 발굴되었다.

‘하사받은 와상농기’라는 민속놀이로 1986년 제5회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차츰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1991년부터 안산문화원에서 ‘와리풍물놀이 전수교육’ 사업을 시작하면서 초·중·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전수교육이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있다.

[놀이도구 및 장소]

꽹과리·장구·북·징·나발·태평소·버꾸 등 악기를 연주하는 놀이꾼과 넓은 공터만 있으면 된다.

[놀이방법]

와리풍물놀이의 가락과 판굿은 인근 지역의 웃다리풍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놀이마당에 들어서면 바로 마당밟기로 들어가고, 이때 마당잽이라는 가락을 치며 오방진을 치는데 이는 와리풍물놀이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 마당잽이는 군대의 진치기를 묘사한 것으로, 놀이와 함께 지신을 밟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마당잽이 가락은 옛 군인들이 군호로 쓰던 것이라고 한다.

1. 판굿

판굿은 상쇠의 기량, 버꾸잡이들의 기량, 놀이를 연출하는 사람이나 연희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기본적인 판굿의 짜임은 다음과 같다. ①잽이모으기, ②마당밟기[오방진], ③돌림버꾸, ④쩍쩍이굿, ⑤당산벌림, ⑥쌍줄백이, ⑦인놀음, ⑧멍석말이, ⑨사통백이, ⑩ 새치기, ⑪마당씻기, ⑫인사굿 등이다.

2. 진풀이

진풀이는 ①잽이모으기, ②입장, ③인사굿, ④마당밟기[오방진], ⑤돌림버꾸, ⑥쩍쩍이굿, ⑦당산벌림, ⑧쌍줄박이, ⑨개인놀음, ⑩멍석말이, ⑪사통백이, ⑫가새치기, ⑬마당씻기, ⑭퇴장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3. 가락

가락은 더드래기[삼채]와 타지역의 인사굿과 마지막 장단이 약간 다른 인사굿, 마당잽이, 마당삼채, 몰아잽이, 섭치기, 우물가락[샘굿], 길군악[칠채], 길군악 쇠 변형가락, 장구 변형가락, 넙치기 [3+3가락], 쩍쩍이 가락, 연풍대, 허튼가락[탈춤가락], 짠지패가락[굿거리] 등 다양하다.

[현황]

동작리는 현재 안산강서고등학교가 위치한 자리에 있던 마을로, 일명 방죽말로 불리던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동작리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시흥군 수암면 와리에 속하였다. 그 후 1976년부터 시작한 안산 신도시 개발로 이주민들이 생기기 시작하여 1987년 50여 호가 살던 마을은 완전히 폐동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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