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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480
한자 祭禮
영어음역 Jaerye
영어의미역 Worship Service
이칭/별칭 제사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경기도 안산시
집필자 김지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례

[정의]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돌아가신 조상이나 특정한 신명(神明)을 받들어 복을 빌기 위해 행하는 추모 의례.

[개설]

제례는 원래 천지(天地)와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비롯하여 풍사(風師)·우사(雨師)·사직(社稷)·산악·강천(江川)과 선왕(先王)·선조(先祖)·선사(先師)를 대상으로 하는 제사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조상에 대한 의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어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제사는 크게 국가에서 지내는 국가제사와 집에서 지내는 집안제사로 구분할 수 있다. 국가제사는 종묘대제(宗廟大祭)를 비롯한 대사(大祀), 선농제(先農祭) 등의 중사(中祀), 명산대천제(名山大川祭) 등의 소사(小祀)로 나누어진다. 집안제사는 조상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일컫는데, 상중(喪中)에 지내는 흉제(凶祭)와 평상시에 지내는 사시제(四時祭)·기제(忌祭)·묘제(墓祭)·속절차례(俗節茶禮) 등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의 제사가 사라지고 상중의 제사 일부와 기제사·차례만 남아 있고, 묘사는 성묘로 대체되고 있다. 집안제사의 하나인 사시제는 계절마다 지내는 제사로서, 중월(仲月)인 2월·5월·8월·11월에 지낸다. 기일제(忌日祭)는 기제(忌祭)라고도 하는데, 4대조까지의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이다. 묘제(墓祭)는 10월 초순에서 중순경에 지낸다. 묘제는 산소에서 지내기 때문에 여성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차례(茶禮)는 속절제사로 차사(茶祀)라고도 한다. 『예서(禮書)』에서는 차례를 제사로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사당에서 행하는 절사(節祀)나 참배와 성격이 유사하다. 차례는 정식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설에는 떡국, 한식에는 진달래 화전과 쑥절편, 추석에는 송편 등 계절음식을 올린다. 축문은 읽지 않고, 헌작도 한 번만 하는 무축단헌(無祝單獻)으로 지내는데, 요즘에는 설과 추석 명절에만 지낸다.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는 4대가 지나도 해당 신주를 체천(遞遷)하거나 매주(埋主)하지 않고 영구히 사당에 모시고 봉사하는 기제사로 부조위(不祧位)라고도 한다. 현재 안산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제사는 기제사와 문중의 묘제, 설과 추석, 한식에 지내는 차례 정도이다.

제사는 4대조까지만 지내는 4대봉사가 원칙이다. 이는 동당지친(同堂之親)의 처음인 4대 고조까지를 기제사의 봉사대수로 한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사에 참여하는 자손은 8촌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4대 봉사를 3대 혹은 2대로 줄이거나, 일 년 중 특정한 날을 잡아 한 번에 행하는 경우도 있다. 안산 지역에는 노론(老論) 집안과 남인(南人) 집안이 공존하고 있어 서로의 예론을 주장하고 그 전통을 따랐다. 이로 인해 제사의 절차·행위·상차림 등 제사 진행의 세부 사항에서 차이를 보이는 점이 있다.

[연원 및 변천]

『문공가례』가 우리나라에 보급되면서 조선시대 명종(明宗) 이후부터 사대부는 물론 서인에 이르기까지 4대 봉사를 해왔다. 1969년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에 기제의 대상을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로 한정하여 지내도록 하였고, 행사의 방법도 양위가 모두 별세하였을 경우 합사(合祀)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4대 봉사가 유지되고 합사를 기피하고 있다. 현대 생활패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제사를 효도의 연장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사를 묘소에 직접 찾아가 지내지 않고 주로 재실을 이용하거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산소를 한 곳에 모으는 집묘(集墓)가 증가하고 있으며, 합봉(合封)을 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어 제사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절차]

1. 제수 차림

안산 지역에는 노론(老論) 집안과 남인(南人) 집안이 공존하고 있어 서로의 예론을 주장하고 그 전통을 따르고 있다. 제사에서 노론과 남인의 가장 큰 차이는 상차림에 있다. 노론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주인의 입장에서 좌우(左右)를 가리고, 남인은 신위의 입장에서 좌우를 가리는 것이 차이의 원인이다. 그래서 노론은 과일의 놓는 순서를 홍동백서(紅東白西), 두동미서(頭東尾西), 포는 서쪽으로 놓았다. 또한 신위를 좌정시킬 때 좌고(左考)라고 하여 고위를 왼쪽으로 보았다.

한편 남인은 포(胞)를 엎어 놓고, 머리가 서쪽으로 향하게 놓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내탕외적(內湯外炙)이라고 하여 신위 쪽에는 탕을, 제사를 지내는 집사자 쪽에는 적을 놓는다고 하였다. 부곡동의 주민 유문형의 경우 남인 집안으로 제사상차림을 비교해 보면 채소의 위치가 다르며, 포와 식해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 있고 다른 것은 대동소이하다. 즉 남인의 제상에는 식해가 서쪽에 있고, 포가 동쪽에 놓이는 것이 다르다.

2. 제사 절차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거주하는 유문형[남, 65세]이 1997년 1월 5일[음력 병자년 11월 26일]에 행한 증조모(曾祖母) 기제사(忌祭祀)를 살펴보기로 한다. 도시생활로 인해 자손들이 제사에 참석하기 어려워 제사를 지내는 시간을 파제일 저녁으로 바꾸었다. 제삿날이 되면 제사에 올릴 제수(祭需)를 준비하고, 지방(紙榜)과 축문(祝文)을 마련한다. 제사에 참사(參祀)할 자손들이 모두 모이면 제사를 지낸다. 동생이 아헌관(亞獻官)을 하였고, 맏아들이 종헌관(終獻官)을 맡았다.

1) 진설: 저녁 7시경에 안채의 대청에 병풍을 치고 제상을 마련하고 진설하였다. 특히 이 댁에는 「행숭정대부이조판서정재공시사기(行崇政大夫吏曹判書靜齋公時祀記)」라고 하는 진설도(陳設圖)에 따라 진설하고 있다. 이 진설도에서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제수와 현재의 제수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계절의 차이에 따른 시절음식의 차이, 과거와 현대의 식생활 차이 때문이다.

2) 강신(降神): 강신은 유씨가 하였는데, 분향(焚香)을 하고 술을 올리고 나서 재배하였다. 이때 모든 참석자들이 참신(參神)한다.

3) 초헌례(初獻禮): 이어서 초헌을 하고, 메를 담은 식기의 뚜껑을 여는 계반개(啓飯盖)를 하고 시저(匙箸)를 시접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4) 독축(讀祝): 정저(正著)가 끝난 후 참석자들이 모두 부복하고 독축을 하였다.

5) 아헌례(亞獻禮): 아헌관이 향탁 앞에 나와 다시 향을 피웠다. 역시 술 2잔을 올리고 자반을 적(炙) 위에 올렸다. 아헌관이 재배하였다.

6) 종헌례(終獻禮): 종헌관이 향탁 앞에 나와 꿇어앉아 역시 향을 피웠다. 술 2잔을 올린 후 재배하였는데, 자반을 올리지는 않았다. 주인이 다시 향상 앞으로 나와 향을 피웠다.

7) 첨작(添酌): 메 뚜껑에 술을 부어 종헌관이 삼작하여 올린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는 첨작(添酌)을 하였다. 좌우 집사가 나와서 숟가락을 메에 꽂는 삽시(揷匙)를 하였고, 주인이 재배하였다.

8) 합문(闔門): 주인이 물러나 제자리로 가서 정위치 하자 집사자들이 병풍을 앞으로 돌려 제상을 가렸다. 그리고 천장에는 차일을 치고, 족자를 꺼내어 병풍에 걸어 놓았다. 참사자들은 모두 조용히 서 있었다. 합문의 절차이다.

9) 계문(啓門): 주인의 기침소리를 신호로 병풍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족자는 말아 치웠고, 차일은 그대로 두었다. 계문의 절차이다.

10) 헌다(獻茶): 이어 숭늉을 올리는 헌다를 하였다. 집사자들이 메를 세 숟가락 떠서 숭늉 그릇에 풀었다. 주인이 향탁 앞에 나와 꿇어앉자 참석자들이 모두 부복하여 잠시 기다렸다.

11) 낙시저(落匙箸): 잠시 후 참석자들이 일어서자 수저를 내리는 낙시저를 하고, 메그릇의 뚜껑을 덮는 합반개(合飯蓋)를 하였다.

12) 사신(辭神): 일동이 제사상의 신주를 향해 재배한다. 이어서 축과 지방을 태우고 철상하였다.

13) 음복: 철상을 하자 곧바로 음복을 하였다. 음복은 먼저 술 음복을 한 후 저녁을 먹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저녁은 제사상에 올렸던 제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서울에 있는 동생 등이 모두 떠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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