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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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關里南關鎭創建碑 |
영어공식명칭 | Stele about Establishment of Namgwanjin in Namgwan-ri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463-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철 |
건립 시기/일시 | 1873년 -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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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8년 2월 22일 -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 완주군 향토문화재 지정 |
현 소재지 |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 -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463-1 |
원소재지 |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 -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남관 철로변 |
성격 | 비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너비,두께) | 178㎝[높이]|67㎝[폭]|29㎝[두께]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남관리에 있는 조선 후기 남관진의 창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는 남관진의 창건 내용을 기록하기 위해 1873년(고종 10)에 세워졌다.
[위치]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는 전주-남원 간 도로변 완주군 상관면 남관초등학교의 교차로에서 남관성결교회로 우회전하는 곳에 있다.
[형태]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는 개석[뚜껑돌]과 비신[비석의 중심을 이루는 비문을 새긴 돌], 대좌[비석을 받치는 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석의 크기는 79㎝, 110㎝, 45㎝, 비신은 180㎝, 79㎝, 45㎝이다. 대좌는 지표에 묻혀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다. 개석은 팔작지붕[사다리꼴의 맞배지붕에 측면에 지붕을 달아낸 형태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모두 갖춘 지붕형식]의 형태를 보이고 개석과 비신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금석문]
비문에는 “동어(桐漁) 이공(李公)과 반남(潘南) 박공(朴公)이 본도(本道)의 관찰사로 있으면서 남고산(南古山)에 성을 쌓아 진(鎭)을 설치하고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남관(南關)에도 성을 쌓았으나 완공되기 전에 중단되었다. 따라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근심하고 개탄한 지 6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낙재(樂齋) 이공(李公)이 본도의 관찰사로 4년간 재임하면서 사유를 갖추어 임금께 아뢰고 대원위(大院位)에게도 품의(稟議)하여 마침내 계유년[고종 10, 1873년] 4월에 먼저 남관성(南關城)을 수축하였다. 남고성과는 성문루의 거리가 십 리쯤 되는 곳으로 냇물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였다. 진장의 관아를 설치하고 여러 개의 창고도 세웠으며 장대(將臺)는 남쪽에 있고 화포청(火砲廳)은 서쪽에 두었는데 모두 백여 칸이나 되었다. 대략 진지로서의 형세가 뛰어나서 험준하기가 마치 하늘이 지어놓은 듯하였으며, 중국의 촉도(蜀道)나 진관(秦關)과 어깨를 겨룰 만하였다. 처음 이곳을 건설할 때부터 이공(李公)은 말없이 계획을 묵묵히 추진하여 조금도 번거롭거나 흩어짐이 없이 요란하지 않게 7개월간 추진하여 마침내 천년 풍패(豊沛)의 고장에 빠른 시일 내에 방어성을 완성하였으니 훌륭한 일이로다. 하물며 대야 이공이 안찰사로 온 이후 모든 일을 거행하는데 정치는 잘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화평하였다. 평중(平仲)의 아량과 정공(鄭公)의 덕망(德望)으로 상주(緗州) 사민에게 오랫동안 제사를 받았고 오늘날 이곳을 지나는 영호남 사민이 다 같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낙재 이공의 공덕을 오래도록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일로서 어찌 다만 백 년 시축으로 끝내고 말 일인가’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이를 비석에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숭정 기원후 다섯 번째 계유년[고종 10, 1873년] 9월 일. 별감동부사과(別監董副司果) 서찬보(徐贊輔), 감동도감관(監董都監官) 전첨사(前僉使) 백낙서(白樂瑞), 절충장군(折衝將軍) 최봉언(崔鳳彦), 간역(看役) 가선대부(嘉善大夫) 김재영(金在永), 기와를 굽고 돌을 뜨고 나무를 벤 색리(色吏) 김노홍(金魯洪) 정봉익(鄭鳳翊) 장인행(張仁行), 내책응(內策應) 백락필(白樂弼), 외책응(外策應) 유덕운(柳德雲)”이라고 적혀 있다.
[현황]
남관 들머리를 ‘비석거리’라 하는데, 이곳엔 판관과 순찰사 등의 선정비 대여섯 기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만 남아 있다. 그동안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는 도로변 잡초 속에 묻혀 있다가 전주·남원 도로확장 및 포장공사 중 발견된 후, 전라금석문연구회의 비문 해석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현재는 이끼와 지의류(地衣類)의 부착으로 인한 풍화와 마모가 심하게 진행된 상태이다. 남관리 남관진 창건비는 2018년 2월 22일에 완주군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