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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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敬泰 |
이칭/별칭 | 3.1운동,예수 병원,영명 학교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희진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월 5일 전라북도 옥구[현 전라북도 군산시]의 예수 병원 사무원으로 재직중 군산 장날인 3월 6일을 기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 수천매를 복사하며 준비하였다가 일본 경찰의 탐지로 동지들이 연행되자, 학생, 예수교 신도, 인근 주민 등 500여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군산 시내를 시위 행진하고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활동했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5일 당시 안경태는 예수 병원 사무 직원으로 있으면서 영명 학교(永明學校) 교사인 이두열(李斗悅)·김수영(金洙榮)·박연세(朴淵世)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群山)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만드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독립 만세 시위 운동 계획이 누설되어 동지들이 연행되자 인근 주민과 기독교 학생 회원들을 규합, 오백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군산 시내로 진출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고 시가 행진을 벌였다. 군산 경찰서 앞에서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안경태는 1919년 3월 31일 광주 지방 법원 군산 지청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19년 4월 3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받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되어 투옥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