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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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洪烈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희진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김홍렬은 1919년 서울 천도교 본부에서 민족 대표로부터 독립 선언서 삼 천 여매를 받아 평안도 일대의 배부 책임자가 되어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이 지방의 독립 만세 운동에 기여하였다. 1919년 3월 5일 서울 시내에서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고향인 옥구[현 전라북도 군산시]로 내려와 1919년 3월 29일 독립 만세 시위를 하려다 체포되었다. 이후 1924년 옥구에서 비밀 결사 조직을 만들어 항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활동 사항]
김홍렬은 1919년 3·1 운동 때 중앙 연락 요원으로 활약하였고, 그후 옥구의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김홍렬은 1919년 2월 28일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종일(李鍾一)로부터 3천 여 매의 독립 선언서를 전해받고, 평안도 일대에 배포하였다. 그 후 고향인 옥구로 내려와 진장권(陳壯權)·채만식(蔡萬植)·김석종(金錫宗)·최한풍(崔漢豊)·황봉규(黃鳳奎) 등과 함께 옥구군 일대의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다가 체포되었다.이때 체포된 김홍렬은 1919년 6월 2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4년에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비밀 결사 조직인 삼성 구락부(三省具樂部)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1924년 11월 28일 옥중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대통령 표창, 1991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