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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152
한자 蔡萬植
이칭/별칭 백릉(白菱)·채옹(菜翁)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황태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 6월 17일연표보기 - 채만식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0년 4월 1일 - 채만식 임피 보통 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4년 3월 26일 - 채만식 임피 보통 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8년 - 채만식 서울 중앙 고등 보통 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2년 3월 19일 - 채만식 서울 중앙 고등 보통 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2년 4월 14일 - 채만식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 조도전 고등 학원 문과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4년 2월 1일 - 채만식 장기 결석으로 제일 조도전 고등 학원 제적 당함
활동 시기/일시 1920년 4월 21일 - 채만식 은선홍과 혼인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채만식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첫 작품 「과도기」 탈고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채만식 동아 일보사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채만식 강화의 한 사립 학교 교원으로 입직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채만식 『조선 문단』에 단편 「세길로」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25년 7월 - 채만식 동아 일보사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0월 - 채만식 동아 일보사 퇴사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채만식 개벽사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채만식, 현인 이갑기와 동반자 논쟁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채만식 조선 일보 입사, 『조선 일보』에 장편 『인형의 집을 나와서』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4년 - 채만식 단편 「레디메이드 人生」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6년 1월 - 채만식 조선 일보 퇴사, 개성으로 이주하여 전업 작가 활동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37년 - 채만식 『조선 일보』에 장편 『탁류』 연재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채만식 잡지 『조광』에 장편 「천하 태평춘」 발표, 장편 『금의 정열』과 단편 「敗北者의 무덤」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채만식 장편집 『탁류』 출판, 『채만식 단편선』 간행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채만식 장편집 『태평천하』 출판, 채만식 안양으로 이거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채만식 서울시 광장리로 이거, 장편 『금의 정열』 출판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채만식 『매일 신보』에 장편 『여인 전기』 연재, 중편집 『배비장』 과 단편집 『집』 출판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채만식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1가 75로 이거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채만식 전라북도 익산시 고현동 중형 댁으로 이주, 단편 「논 이야기」 , 「미스터 방」 발표, 중편집 『허생전』 출판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채만식 단편집 『잘난 사람들』 출판, 『탁류』 3판 간행, 장편 『아름다운 새벽』 출판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채만식 단편 「민족의 죄인」 발표, 장편 『태평 천하』 재판, 『당랑의 전설』 출판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채만식 장편 『탁류』 재판, 채만식 전라북도 익산시 주현동으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채만식 전라북도 익산시 마동 269번지로 이주
몰년 시기/일시 1950년 6월 11일연표보기 - 채만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 6월 11일 - 제1회 채만식 선생 추모 문학의 밤 개최
추모 시기/일시 1984년 8월 2일 - 채만식 문학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96년 6월 11일 - 채만식 문학관 개관
추모 시기/일시 1996년 7월 30일 - 채만식 소설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3년 3월 20일 - 신축 채만식 문학관 개관
출생지 채만식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 동상 마을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채만식 거주지 - 개성부 남산정 956
거주|이주지 채만식 거주지 - 안양
거주|이주지 채만식 거주지 - 서울 광장리
거주|이주지 채만식 거주지 - 전라북도 익산시 고현동
거주|이주지 채만식 거주지 - 전라북도 익산시 주현동
거주|이주지 채만식 거주지 - 전라북도 익산시 마동 269
학교|수학지 채만식 졸업 초등학교 -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동헌길 38번지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채만식 졸업 중고등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길 164번지
학교|수학지 채만식 재학 대학교 - 일본 新宿区 西早稲田1-6-1
활동지 채만식 입직 신문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활동지 채만식 입직 신문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활동지 채만식 입직 신문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111번지
묘소 채만식 묘 -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계남 마을 지도보기
성격 문인
성별
본관 평강(平康)
대표 경력 『탁류』, 『태평 천하』 집필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의 문인.

[개설]

채만식(蔡萬植)의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호는 백릉(白菱)·채옹(采翁)이다. 1902년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동상 마을에서 아버지 채규섭(蔡奎燮)과 어머니 조우섭(趙又燮) 사이의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임피 보통 학교를 졸업한 이후 1918년 경성에 있는 중앙 고등 보통 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은선흥(殷善興)과 결혼했으며, 1922년 재13회 생으로 중앙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봄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1 고등 학원 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3년 여름 방학에 귀국한 뒤 복교하지 않아 이듬해 장기 결석으로 퇴학 처분 되었다.

1924년 경기도 강화의 사립 학교 교원을 시초로 동아 일보사·조선 일보사·개벽사에서 활동했으나 1936년 이래는 창작에만 전념하다가 1945년 4월 고향 임피[현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로 낙향하였다. 1945년 8·15 해방이 된 후 서울로 올라와 잠시 머물렀으며 1946년 이리시 고현동[현 전라북도 익산시]에 내려와 있던 작은 형의 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때 폐결핵이 악화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창작 활동에 전념하여 많은 작품을 썼다. 1950년 6월 11일 이리시 마동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으며,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계남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계남 마을 ] 선산에 안장되었다. 1920년 은선흥(殷善興)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고, 그 뒤 1936년에 만난 김씨영(金氏榮)과 동거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한국 문학사에 총 290여 편에 이르는 장편·단편 소설과 희곡·평론·수필 등을 남겼다.

[활동 사항]

채만식은 1924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 문단』 12월호에 단편 「세 길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작가로 입문한 이후 10년간은 작가라기보다는 기자라는 직업에 더 방점이 놓여 있었다. 채만식은 이 기간 동안 『동아 일보』, 『개벽』, 『별건곤』, 『조선 일보』, 『제1선』, 『혜성』 등 신문사와 잡지사를 전전하며 인터뷰를 잘 쓰는 기자로 명성을 얻었다.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시작되었다. 그는 ‘카프’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문학의 이념에 동조하는 작품 경향으로 인해 ‘동반자 작가’로 불리게 되었으며 1년여에 걸쳐 현인 이갑기와 ‘동반작 작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33년과 1934년에는 『조선 일보』, 『신동아』 등에 장편 『인형의 집을 나와서』와 단편 「레디 메이드 인생」을 발표하며 활발한 문예 활동을 펼쳤다. 이후 1936년 직장을 그만둔 이래 창작에 전념하여 「명일」[1936], 『탁류』[1937], 『천하 태평춘』[1938] 등의 작품을 써내면서 당대 문단의 문제적인 작가로 부상하였다. 1939년 불온 독서회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개성 경찰서에 잡혀가 곤욕을 치른바 있으며 이후 친일 문학에 기울어져 『여인 전기』[1944]와 같은 작품을 쓰고, 시찰단이나 위문단의 일원으로 만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민족의 죄인」[1948]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일제 말기 자신의 친일 행위를 비판하였고, 진보적 중간파의 입장에서 해방 직후 과도기의 혼란상과 부정적 현상 등을 풍자, 비판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저술 및 작품]

채만식의 작품 세계는 당시의 현실 반영과 비판에 집중되어 있다. 식민지 상황 아래에서 농민의 궁핍, 지식인의 고뇌, 도시 하층민의 몰락, 광복 후의 혼란상 등을 실감나게 그리면서 그 근저에 놓여 있는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작품 기법에 있어 매우 다양한 시도를 한 바 있는데, 특히 풍자적 수법에서 큰 수확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말까지는 채만식에 대한 연구가 드물었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연구 업적도 급격히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1970년 국제 PEN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동서 문학의 해학'이 주제로 다루어지면서 그의 문학적 위치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주형 교수는 「채만식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서 채만식의 작품 세계를 다섯 시기로 세분한 바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20년대 : 습작기로 볼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미발표된 첫 작품 「과도기」[1923]인데, 20년대 초 소설의 일반적 경향처럼 절제되지 않은 감정의 표출과 독백체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조혼 같은 폐습, 반민족 행위자, 일본인 등에 대한 젊은 지식인의 증오가 직선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2) 1930-1933년 : 작품 활동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때는 농촌의 현실[「농민의 회계 보고」와 「부촌」], 지식인의 궁핍상[「두부」], 노동자의 갈등[「감독의 안해」], 유이민 현상[「간도행」] 등을 다룬 단편과 희곡을 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작가적 성숙성이 약하다고 하겠는데, 이것은 당시 발표된 작품들의 길이가 짧다는 특징에서 우선 잘 드러난다. 장편 『인형의 집을 나와서』에서는 가정적 관습, 여성 해방 문제, 계급 문제, 노동 문제 등을 다루기도 하였다.

(3) 1934-1938년 : 창작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질적으로도 주목되는 전성기로, 현실 인식의 성숙도와 예술적 성취도가 최고 수준에 이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발표된 「레디 메이드 인생」, 「명일」, 『탁류』, 『태평천하』, 「치숙」, 「소망」 등의 소설과 「제향날」과 같은 희곡은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궁핍한 사회 현실 속에서 소외된 지식인의 무능한 삶을 풍자적·반어적 수법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새로운 풍자 문학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태평천하』의 판소리식 풍자 기법이나 「치숙」과 「소망」의 이중 반어적 우회 표현 기법 등은 채만식 작품의 예술적 성취도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꼽히고 있다.

(4) 1939-1945년 : 일제 강점 시대의 말기 현상과 함께 주체의 갈등과 흔들림이 크던 시기이다. 현실에 대한 직접 부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패배자의 무덤」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자살하는 지식인이나 「냉동어」처럼 의식의 식물 인간 상태가 되어 방황하는 지식인을 그리거나 「종로의 주민」처럼 현실적 지표와 행동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무위 도식하는 지식인 등 현실의 낙오자가 된 지식인들을 통해서 현실을 전면적으로 냉소,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러다가 이른바 ‘독서회’ 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회유와 억압에 흔들리면서 『여인 전기』와 같은 소위 '총후봉공, 내선 일체'의 친체제적인 작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5) 1945-1950년 : 일제 말기 자신의 친일 행위를 자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진보적 중간파의 입장에서 해방 직후 과도기의 혼란상을 여실하게 그려내고자 했다. 「민족의 죄인」, 「역로」를 통해서 일제 말기 지식인의 친일 행위를 자기 비판하였고, 「미스터 방」, 「맹순사」, 「논 이야기」, 「도야지」, 「낙조」 등을 통해서 새로운 조국의 건설 과정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는 민족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풍자하였다.

1970년대에는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 「과도기」, 희곡 「가죽 버선」 등을 비롯한 많은 유작들이 발굴, 공개되었고 1987년에는 추리 소설 『염마』가 새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채만식의 저술로는 단편집 『레디 메이드 인생』, 『잘난 사람들』, 『낙조』 등과 소설집 『탁류』, 희곡집 『당랑의 전설』 등이 있다. 1989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채만식 전집』[총 10권]을 간행하였다.

[묘소]

채만식의 묘는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선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6월 11일 이치백, 이병훈 등 군산의 문인들이 주동하여 제1회 채만식 선생 추모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으며 이후 크고 작은 추모 행사가 매년 군산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추모비로는 1984년 8월 2일 군산 월명 공원에 건립된 채만식 문학비와 1996년 7월 30일 군산시 장미동 구 조선 은행 건물 옆에 세워진 채만식 소설비 등이 있고, 기념관으로는 2001년 3월 군산시 내흥동에 신축 개관한 채만식 문학관군산시 임피면에 위치한 채만식 도서관 등이 있다. 한편 군산시와 군산 문화원에서는 지난 2003년부터 채만식 문학상을 제정, 시상하고 있다. 채만식의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면서 한때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2006년 다시 부활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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