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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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浦大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종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380년 8월 - 진포대첩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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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380년 8월 - 진포대첩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진포 - 전북 군산시 |
종결 장소 | 진포 - 전북 군산시 |
성격 | 해전 |
관련 인물/단체 | 최무선 |
[정의]
1380년 고려 수군이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를 상대로 크게 승리한 해전.
[개설]
우왕 6년인 1380년 진포에서 고려 수군이 처음으로 화약 무기를 사용해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역사적 배경]
1350년부터 왜구는 고려를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여 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고려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수도인 개성까지 침입하여 왕조의 근간을 흔들었다.
[경과]
1380년(우왕 6) 8월 진포에 왜구들이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 하기 위해 군산 방면으로 침입해 왔으며, 군사의 규모는 대체로 10,000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매고, 일부 병력을 남겨둔 채 육지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비롯한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왜구의 대함대가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은 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의 지휘 하에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100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하였다.
진포대첩은 1350년 왜구들이 고려에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 30년 만에 고려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또 대왜구 투쟁에서 고려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이기도 하였다.
[결과]
진포대첩으로 인해 해안에 정박하여 있다가 화포로 모든 배를 잃은 왜구들은 사실상 퇴로를 차단당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육지 깊숙한 곳으로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살인·약탈을 일삼았다.
왜적의 일부는 옥천과 영동 쪽으로 달아나 약탈 행위를 벌였는가 하면, 일부는 상주와 선산, 금산 쪽으로 달아났다. 특히 상주 쪽으로 달아난 왜군의 주력 부대는 다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산(星州)을 거쳐 함양의 동쪽에 있는 사구 내역에 주둔하였다. 정부는 원수 박수경, 배언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싸움에서 져 박수경과 배언을 비롯한 아군 5백 여 명이 전사하였다. 승전에 고무된 왜구들은 함양을 노략질하고 다음 달인 9월에는 남원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들은 운봉현으로 물러나 인월역에서 주둔하면서 "장차 말을 금성[潭陽]에서 먹여 북상하겠다"고 기세를 부렸다.
이에 고려 정부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楊廣全羅慶尙三道巡察使)로 임명하고, 왜구 토벌 명령을 내려, 남원 운봉에서 왜구들을 소탕하였다. 이것 황산 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왜구는 단지 70여 명 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으나 곧 토벌되었다. 진포에 침입할 때 왜구의 수가 10,000명이 넘었는데, 진포대첩과 황산 대첩에 의해 전멸되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황산 대첩의 승리로 고려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아 새 왕조를 개창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황산 대첩은 바로 진포대첩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진포대첩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진포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였다. 지금까지 세계 최초로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격침시킨 해전으로는 1571년 레판토 해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포대첩은 레판토 해전보다 191년 이른 것이다. 둘째, 진포대첩은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진포대첩으로 왜구의 기세가 크게 꺾였던 것이다. 셋째, 진포대첩은 조선 왕조 개창에 일조하였다. 진포대첩으로 이성계의 황산 대첩이 가능하였다. 이성계는 황산 대첩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져 조선왕조 개창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진포대첩은 조선 왕조 개창에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진포대첩은 조선 수군 전술의 모델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역시 진포대첩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즉 진포대첩의 전술은 200년 이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선진적 전술이었고, 또 조선 수군의 전술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