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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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敎育-殿堂今湖學校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희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0년 - 금호학교 폐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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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금호 학교 - 전라북도 군산시 중앙로 91 |
소재지 | 군산 보통학교 - 전라북도 군산시 중앙로 91 |
[정의]
국권 회복 운동기 군산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교육 기관.
[신문물과 교육의 도시 군산]
전라북도 군산은 금강과 서해안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하고 배후에 호남 평야를 두고 있으므로 유사 이래 비옥한 곡창 지대이면서, 문물이 모이고 교류하는 중심지역 이었고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처럼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군산의 역사는 각 시기 국가적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전체 역사와 그 훙망을 같이하였다. 근대기에 들어서 군산은 국제적인 교역지로서 개항되어 근대 물질 문명의 도시로 변모해갔는데, 한편에서는 제국주의 수탈의 교두보가 되기도 하였으나 군산 사람들은 주체성을 지키려는 치열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개항장 인근 지역은 신지식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교육기관들이 생겨났으며, 이 곳에는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려는 선각자들과 새로운 교육을 받으려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운동기에 설립된 금호 학교는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으로서 군산 교육의 특징을 잘 대변하고 있다.
[국권 회복 운동기 군산의 자강 운동과 금호 학교 설립]
1905년 을사늑약이후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의병 항쟁과 자강 운동이 전개되었다. 군산항은 호남 지방의 의병을 진압하는 군대가 상륙하는 주요 거점이었으므로 직접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옥구 지역은 위정 척사 사상의 맥이 이어져오고 있었으며, 임병찬을 중심으로 하는 태인의 무성 서원 기의가 호남 지방 의병 항쟁의 기폭제가 되고 옥구 지방의 유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의병 항쟁에 개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개항장인 군산항을 중심으로는 자강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다양한 종류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군산항의 자강 운동은 1907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군산항에서 자강 운동의 모태가 된 것은 1907년에 설립된 옥구 군산항 민단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자강 운동 단체들이 만들어졌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민회가 설립되어 지역민의 단결을 통한 지역 자치를 꾀하였다.
군산항의 민단은 1907년 3월경에 옥구 부윤 이무영이 중심이 되어 창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무영은 1906년 8월 옥구 감리로 부임 하였다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감리서가 없어진 뒤에 옥구 부윤이 되었는데, 옥구 지역 자강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무영은 1885년 조선 정부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문학에서 영어 교육을 받은 뒤에 주로 외교 업무와 개항장의 관리로 근무하였다. 특히 독립 협회에 적극 참여 하여 만민 공동회의 최초 상소문 봉소 위원을 역임하였고, 1898년 11월에는 관직을 그만두고 만민 공동회 활동에 전력하였다. 이후 무안항, 동래항을 거쳐 옥구항 감리로 부임하였다. 이러한 민권 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무영은 군산항 감리로 임명된 이후 민단 설립에 앞장섰다. 군산항의 민단은 전국적으로 보아서 매우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이무영이 민단을 설립하고 규칙을 정부에 보고하였다는 기사가 1907년 3월 16일자 『대한 매일 신보』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서 대략 이 시기에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민단이 규칙과 체계를 갖추기는 하였으나 외지에서 부임한 부윤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곧바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군산항 민단은 1907년 중반 들어 옥구, 군산 지역에 연고를 가진 전현직 관료와 지주, 군산항 객주들이 참여하면서 새롭게 재창립된 것으로 보인다.
옥구 군산항 민단은 1907년 7월말에 확대 재창립된 뒤에 취지서를 『황성 신문』에 기고하였다. 취지서에서는 나라의 흥망은 조정에 관계되기 보다는 백성에게 크게 관계되는 것으로 백성이 개명하고 민력을 충실히 하여 단결하면 능히 국권과 국토를 보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 한국은 민단이 자치하는 제도가 없어서 자립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으므로 이제 단체를 만들어 계몽 운동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민단을 통한 자치와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하였으나 주요 방법은 단결하여 민지를 개발하고 민력을 충실히 하는 것으로 교육과 산업 육성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옥구 군산항 민단은 군산 지방의 대표적인 자강 운동 단체로서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는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옥구 군산항 민단이 중심이 되어서 이후 전국적인 계몽 운동 단체인 대한 협회 군산 지회가 설립되었다.
옥구 군산항 민단이 추진한 대표적인 일은 교육 활동이었다. 1907년 봄 민단 창립 초기에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사립 학교 또는 군산항 민단 강습소 등으로 불리다가 1908년 학부 대신이 방문한 뒤에 이름을 금호 학교라고 하였다. 학교 설립의 발기인은 옥구 부윤 이무영이었고 교장은 조병승이었다.
[금호 학교의 교육]
금호 학교는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으므로 당시에 선각적인 지식인들이 학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교원은 노철우, 한승리였다. 노철우는 군산 개항시에 옥구 세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영어에 능통한 전직 관리였으며, 한승리는 탁지부 주사를 역임하였던 전직관료였는데, 전국적인 자강운동 단체였던 대한 협회에 적극참여하여 계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금호 학교 학생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금호 학교의 교육 활동에 대해서는 인촌 김성수의 일생을 다룬 『김성수』에 잘 드러나 있다.
“[김성수는] 줄포와 흥덕 사이에 있는 후포에서 대한 협회의 강연회가 있다하여 가 보았다. ...연사는 한승리라고 하는 대한 협회 파견원이었다....그날 밤 김성수는 한승리를 숙소로 찾아갔다. ”무엇보다도 주권재민, 만민 평등이라 하시는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연하지요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닙니다. 부디 인권에 눈을 뜨고 새 문명을 일반대중에게 일깨워 주는 일꾼이 돼 주시오.” “저도 그럴 생각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선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어를요”...“그렇다면 군산에 있는 금호 학교로 오시오” “영어를 가르쳐 주나요?” “그렇소이다. 영어 뿐 아니라 일본어도 가르치고 국어 산수 역사 지리......그 밖에도 물리 화학 체조 창가까지 가르치고 있지요”....한승리, 그는 바로 군산 금호 학교에서 영어와 물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였다. 이렇게 해서 김성수는 지방 학교로서는 꽤 규모가 크고 충실한 금호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신학문의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알게된 것이다.
금호 학교의 교육 과정은 중등 과정으로 체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률, 산술, 영어, 일어 외에도 물리,화학, 체조, 창가까지 가르쳤고 야간부도 두어서 일어과와 직조과도 있었다고 한다.
금호 학교는 호남의 대표적인 교육 기관으로 유수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후 한국사회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열을 대표하는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가 금호 학교의 학생이었으며, 조선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김철수도 금호 학교 출신이었다. 일본인들은 금호 학교의 교육이 통감부 하 일제의 교육에 대항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1909년 일진회가 합방 청원서를 제출하자 금호 학교 교사 임항재와 학생 29명은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대한 매일 신보』를 통해 발표하는 등 애국적인 인재를 양성하려고 했다.
금호 학교의 재정은 옥구 군산항 민단을 중심으로 하는 군산 지역민들의 의연금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군산 지역의 객주들의 상회사인 창성사에서도 금호 학교의 운영을 위한 재원을 정기적으로 부담하였다. 하지만 의연금으로 유지되었으므로 안정적인 재정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금호 학교 학생들의 국권 회복 운동과 일본의 식민지 교육 체제 정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조선 지배 정책을 수립하는데서 대한 제국에 의해 설립된 학교와 한국인들의 교육 운동을 말살하고 개조하는데 주력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한국인들은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들을 보이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한국의 교육 자치의 체계와 교육 내용을 근저에서 단절하고 개조하려고 했다. 군산 지역의 교육도 왜곡과 굴절을 겪게 되었다.
금호 학교는 전라북도 지역의 대표적인 중등 교육 기관으로서 금호 학교의 중등과는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특히 금호 학교 졸업생들은 이후의 학업을 위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일제는 한국의 인문 교육이 일본의 지배에 대해 비판적인 인물을 양성할 뿐 만 아니라 일본의 경제적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초등 교육 기관을 훈련에 중점을 둠과 아울러 직접 농경과 연계하는 실업 교육을 실시하고 완성 교육 기관이 되도록 하려고 했다. 그 이상의 진학을 모색하는 사람은 소수의 학생들에 한하여 실업 학교에 진학하도록 하였는데 군산 보통 학교에 실업 학교를 병설하였다.
일본은 저급한 실업 중심의 교육 정책을 추진하면서 종래 한국인에 의한 사립 학교에 대한 탄압 정책을 취하였다. 금호 학교가 가장 직접적인 대상이었다. 일본은 사립 학교령을 만들어 학교를 새롭게 인가 받도록 하고, 교육 내용을 통제하였다. 그리고 기부금 취제 규칙을 만들어 기부금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는 학교의 유지를 어렵게 만들어 결국 금호 학교는 문을 닫고 금호 학교의 재산은 군산 보통 학교에 흡수되었다. 대한제국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였으면 금호 학교는 군산 지역의 명문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나 1910년 국권이 상실되면서 금호 학교는 폐쇄되고 학교의 재산은 군산 공립 보통 학교에 흡수되었다. 금호 학교의 역사가 바로 한국 근대 교육 굴절의 역사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금호 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다. 또한 군산 지역은 이러한 교육들이 뒷받침되어서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운동, 노동운동의 중추지대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