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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임금의 자취가 깃든 종현 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E010102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 종현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진호

종현 마을은 시화방조제를 지나 대부도에서 약 2㎞쯤 동쪽 방향으로 가다가 영흥화력발전소 길로 접어들면서부터 시작된다. 법정동은 대부북동이며 행정동은 대부동이다. 종현 마을은 대부도의 중심에 위치한 곳으로 주민 대부분이 반농반어의 생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이다.

예전에는 종현마을을 북을 두드린다는 의미의 ‘북두리’라고도 불렀다. 마을의 형상을 보면 마을 뒷산이 전체적으로 종의 모습과 흡사하고, 마을이 앉은 자리는 종의 움푹 파인 곳처럼 보인다. 그래서 ‘쇠북 종(鍾)’자를 써서 종을 걸어놓은 듯한 마을이라는 의미로 종현 마을(鍾懸洞)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혹은 술잔을 엎어서 걸어놓은 모양이라 종현 마을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종현 마을은 황금산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린 한 줄기가 혈(穴)을 이룬 절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서남향을 하고 있으며, 양지이다. 따라서 마을의 진산(鎭山)은 절산이 된다.

절산 아래에는 당재가 있는데, 이곳은 굿 등을 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절산에서 양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는 이 마을을 감싸는 청룡과 백호가 되는데, 대부분의 집들은 이 청룡과 백호 안에 들어 있어 마을을 뚜렷하게 구분해주고 있다. 이에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서향이나 남향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안길은 마을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중심으로 나뭇가지 형태로 갈라진다. 마을 내부에서는 각기 작은 골목으로 갈라지는데, 마을 안길은 넓은 편이고 포장이 되어있다. 마을을 가로로 관통하는 중심 도로가 남북으로 길게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방아머리에 닿고, 이어서 시화방조제를 거쳐 안산으로 갈 수 있다.

종현 마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인조 임금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인조(仁祖)이괄(李适)의 난[1624년]을 피해 현 종현 마을이 있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잠시 쉬던 중에, 신하에게 저 앞에 보이는 우거진 숲 속에 우물이 있을 것 같으니 물을 찾아보라고 손으로 숲 속을 가리켰다. 신하가 황급히 그 곳에 들어가 찾아보니 정말로 우물이 있어,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마침 목이 마른 터라 왕은 시원한 샘물을 단숨에 들이켰고,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신비한 샘물 맛에 반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우물은 왕이 가리킨 우물이라 하여 ‘왕지정(王指井)[일명 왕짓물]’이라 칭하게 되었는데, 왕이 기념으로 쇠로 만든 종을 하사하여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종현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종현 마을에는 30여 세대가 살고 있는데, 외지 사람들의 전입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그 이유는 구봉도의 펜션 지역에 사업하러 들어온 사람, 농지 취득을 위해 전입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시화방조제를 거쳐 서위[방아머리의 옛 이름]를 지나 대부도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원래 10호밖에 살지 않았으나 근래 장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음식점과 상가들이 계속 생기고 있다.

[정보제공]

  • •  홍성웅(남, 1941년생, 대부북동 거주, 전 대부면 부면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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