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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바다에서 벌어진 왜놈과 뙤놈 싸움 - 풍도해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D020102
한자 남의 바다에서 벌어진 왜놈과 뙤놈 싸움 - 豊島海戰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홍영의

풍도는 서해를 오가는 해상 뱃길과 남쪽 연안항로가 만나는 곳으로 경기만에서 한양으로 가는 직항로였다. 경기만은 고대 이래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거쳐 특히 고려에 이르면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외교의 중심지이며, 물류의 핵심 허브였다. 따라서 풍도 항로는 선박의 뱃길로서 대중국뿐만 아니라,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목이었다.

조선 후기 이후 조선을 알고 싶어 하거나 통상을 목적으로 하는 외국에서는 선박을 보내 자주 조선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수도인 한양 가까이 들어오려면 반드시 풍도 인근을 거쳐야 했는데, 바로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풍도에서는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왜놈과 뙤놈이 벌인 ‘풍도해전’이 발발하였다.

1894년 7월 ‘본선 뱃길’인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기습 격침했던 풍도해전은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시발이었다. 우리가 한산도대첩을 자랑스러워하듯, 일본 역시 이 풍도해전을 그들의 역사 교과서에 실을 정도로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이처럼 풍도는 전략상 서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서해 바다에서 일어난 풍도해전으로 시작된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1894년 봄에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였다. 동학군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3,0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고, 일본은 이에 항의하여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군대를 보냄으로써 갑신정변 이래 10년 만에 청일 양국의 대규모 군대가 한반도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재연된 것이다.

청의 함대가 아산만 일대로 진출하자, 일본대본영은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伊東]에게 비밀 작전을 하달하였다. 기습공격을 통해 청의 함대를 격파하여 청의 기세를 꺾으라는 것이었다. 이토는 아산에서 중국 여순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안산 앞바다의 풍도 인근에 전함 15척, 수뢰정 6청을 숨겨놓았다. 그리고 추가로 쾌속 순양함 3척을 조선 해안을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풍도 앞바다로 함께 보냈다.

풍도의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힐 무렵인 오전 7시 52분경, 풍도 해안에는 청나라 북양함대 소속 3천 톤급 황룡(黃龍) 1, 2호 군함이 100여 미터 사이를 두고 정박 중이었다. 200㎜ 함포가 좌현 우현 각 2문씩 장착된 이 군함들은 구미 열강들의 군함에 비해 볼품없었지만 청의 해군력을 지탱하고 있는 주력함으로서, 수일 전 본국 대련항(大連港)에서 보병 2천여 명을 싣고 조선의 내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아산만에 들어와 있었다.

일본 해군 제1유격대 소속 ‘요시노[吉野]’, ‘아키츠시마[秋津州]’, ‘나나이[浪速]’ 호 등 3척의 쾌속 순양함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청나라의 황룡 1, 2호는 7월 25일 새벽 병력 수송선의 호위 임무를 마치고 아산에서 기지인 중국의 여순항으로 귀환하기 위해 풍도 서북해상을 지나가고 있었다.

일본 전함 1진은 4천 톤급 규모로 300㎜ 함포 8문을 장착한 전함들로, 우수한 독일 조선기술의 도움으로 막대한 군비를 들여 진수시킨 일본 해군의 정예 전함들이었다. 본국의 지령에 따라 청의 함대를 섬멸시키고 조선 인천항에 상륙, 싣고 온 3,000여 명의 보병으로 하여금 한성을 공략할 목적으로 경기만에 포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먼저 청 함대 제원호(濟遠號)에 포격을 시작, 곧이어 공격을 계속하였다. 약 한 시간 반 정도의 전투 끝에 광을호(廣乙號)는 포격으로 화약고가 폭발한 채 암초에 좌초되면서 심각한 손상을 받았다. 제원호의 함장은 백기를 내걸고 항복하려 하였으나 청병 수병들이 이에 반발, 일본 군함에 포격을 가하는 등 저항을 하면서 부서진 채로 탈출하여 여순항으로 돌아갔다. 이 공격으로 일본 군함 요시노호가 타격을 입기도 했다.

한편, 호위함 조강호(操江號)와 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를 실고 아산으로 들어가던 고승호(高升號)는 일본 군함의 공격을 받았으며, 조강호는 나포되었다. 원래 고승호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 선박회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 소유의 2,134톤급 영국 상선으로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이었다. 이 배에는 골즈워시(T. R. Galsworthy) 선장과 64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청나라의 고문인 독일의 포병장교 하네켄(Hanneken) 소령도 승선하고 있었고, 7월 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두 배를 가로막은 것은 도고 헤이하치로 선장이 지휘한 순양함 나니와호였다. 군함은 결국 포획되었고, 일본은 고승호에 나니와호를 따를 것과 승선한 유럽인들은 나니와호로 옮겨 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승선한 1,200명의 중국인들은 영국 선장과 선원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결국 4시간의 협상 끝에 도고 함장은 사격을 명하였다. 유럽인들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중국인들은 이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유럽 승무원들을 구한 건 일본군이었다. 고승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군 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법으로 처리되었다.

이것이 풍도해전이며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풍도해전은 일본의 대승으로 끝났고, 일본은 이후 한반도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같은 날 일본군 4,000명은 아산과 성환에 주둔해 있던 청군을 공격했다. 청나라 총병 섭사성(聶士成)이 끌던 부대가 패전하자 해군 제독 엽지초(葉志超)는 탈주했고, 아산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은 일본 군함이 청 군함의 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청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안산 앞바다에 있는 풍도에서의 짧은 전투가 일본을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하게 한 것이다. 패자인 청국은 반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반면, 조선은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비극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풍도해전은 사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사건이지만 일본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현재 일본의 중·고교 역사교과서에 풍도해전은 지도와 함께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성환, 평양에서 연이어 승리하였으며, 황해해전[1894. 9. 17]에서 청나라의 주력함대인 북양함대(北洋艦隊)를 격파하고 요동반도로 진출하였다. 그 후 위해(威海)에서 북양함대를 격멸[1895. 2. 12]하자, 청 북양함대사령관 정여창(丁汝昌)이 일본 함대에 항복하게 된다. 이렇게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고,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체결로 전쟁은 완전 종결되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요동반도(遼東半島) 분할에 반대한 러시아·독일·프랑스 ‘삼국간섭’을 맺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 내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풍도에서 벌어진 청일 양국의 국제전은 우리 땅에서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왜놈과 뙤놈 간의 싸움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뼈아픈 사건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여 대제국 건설이란 허망된 꿈을 꾸게 된 출발점이 지금도 그들의 역사교과서에서 자랑스럽게 다루고 있는 풍도해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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