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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선이 지나던 길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D020101
한자 異樣船이 지나던 길목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홍영의

강이나 바다를 통로로 선박이 지나다니는 길을 뱃길[航路]이라고도 한다. 뱃길은 원칙적으로는 두 지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택하지만 지형·기상·해상·경제·항해기술 등 여러 조건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배의 통행이 가장 쉬운 항로가 이용된다. 이와 같은 뱃길은 전통시대 국가 재정원인 세곡미를 지방에서 중앙으로 운송하는 데 가장 적합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 이래로 세곡의 운송이 중시되면서 조운제도가 점차 확립되어 갔다. 또한 강이나 하천의 포구는 조운 외에도 민간수용품의 수송, 즉 교역의 장이었다.

뱃길은 강이나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에 따라 강안뱃길, 연안뱃길, 해양뱃길로 구분된다. 강안 뱃길에는 전통시대 세금으로 거둔 쌀을 운반하는 조운로(漕運路)나 소금이나 쌀 등을 운반했던 수운로(水運路)가 있다. 연안뱃길은 해안 가까이 운행되는 뱃길로 주로 철선·전용선·컨테이너선 등이 운행된다. 수송 주체에 따라 여객 뱃길과 화물 뱃길로 나뉘는데, 여객 뱃길은 다시 연안 뱃길, 육지·도서간 뱃길, 관광 뱃길을 포함한 일반 뱃길과 명령 뱃길로 나뉜다. 명령 뱃길은 정치·경제상 필요에 의하여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거나 세금을 변제하는 특권을 주면서 해운업자에게 경영을 명령하는 뱃길이다. 그 밖에 정기적으로 항해하는 뱃길과 부정기적으로 항해하는 뱃길이 있으며, 운송상 역할에 따라 간선뱃길[幹線航路]·지선뱃길[支線航路]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풍도는 2009년 현재도 해군 부대가 상주하며 항로상의 각종 선박을 감시하고 있을 정도로 경기만의 뱃길 관문이다. 경기만을 통해 인천과 평택, 당진을 오가는 수많은 대형 화물선과 수송선 및 어선들의 본선 항로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1986년 8월 16일에 건립된 풍도등대 역시 인천과 평택, 당진을 오가는 선박의 해상교통 안전을 위해 세워졌을 만큼 서해의 요충지로서 중요시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일본 해군 영웅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동해에 독도, 서해에는 풍도’를 차지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일찍부터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풍도 인근에는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였다. 이양선이란 조선 연안 지역에 출몰했던 정체불명의 배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단선(異團船), 황당선(荒唐船)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전기 중종 때는 당황선(唐惶船)이란 표현도 보이는데, 이것은 이양선에 앞서 정체불명의 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모양이 동양 세계의 배와 달리 특이한 모양이라 하여 이양선이란 이름이 붙었다. 대부분 유럽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상선, 함선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양선은 『정조실록(正祖實錄)』 1794년(정조 18)조에 “호서 마량진에 이양선이 출몰하였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이때의 배는 서양의 배가 아니라 중국 남부나 류큐[流球]의 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735년(영조 11) 황해도 초도에, 1780년(정조 4) 전라도 흑산도에, 1797년(정조 21) 경상도 동래에 이양선이 나타났기도 했다. 이후 서양의 이양선들이 조선 해역에 본격적으로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부터였다. 대부분은 통상을 요구하고 우리나라가 거부하는 식으로 끝났지만, 간혹 이양선이 우리나라 해안가에 상륙해 그 지역의 관리들과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 때는 무려 128건이 등장하며, 대부분의 이양선은 이 시기의 것이다.

풍도에 나타난 이양선의 기록도 주로 고종 때 보인다. 즉 고종 3년[1866] 9월 12일의 공충수사(公忠水使) 임상준(任商準)의 보고에 따르면, “이양선 11척이 이달 초4일 저녁 썰물 때, 서해 작종(作綜)에서부터 경기(京畿) 풍도(楓島) 앞바다를 향해 갔습니다[『고종실록(高宗實錄)』]”라고 하였으며, 5년 뒤인 1871년(고종 8) 4월 6일 수원유수 신석희(申錫禧)풍도와 배리도(排李島)[현 도리도]에 이양선이 나타났음을 보고한 것 등이 있다.

『고종실록』에는 또 1871년 4월 6일[을축]에 “수원 유수(水原留守) 신석희(申錫禧)가, ‘이달 3일 유시(酉時) 쯤에 이양선(異樣船) 5척이 풍도(楓島)의 뒷바다 북쪽 남양(南陽) 경계에 정박하였습니다. 특별히 감시하고 계속 치보(馳報)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또, “5일 신시(申時)쯤에 이양선 4척이 남쪽 바다 배리도(排李島)[도리도] 안에 와서 섰습니다. 이 섬은 풍도 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감시를 따로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따로 영리한 장교를 선정하여 두 곳에 나누어 보내 자세히 감시하고 계속 상세히 보고하게 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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