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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렁패가 길잡이였던 당제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D010203
한자 뚜르렁패가 길잡이였던 堂祭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영의

풍도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음력 섣달 그믐께부터 정월 초하루를 전후하여 뚜드렁패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상모놀이와 탈을 쓴 잡색까지 일체를 갖춘 풍물을 치며 마을과 절집을 도는 지신밟기를 했다. 보통 2~3일이 걸렸는데, 마지막 날에는 무당을 불러 동네굿을 한 다음 다시 날을 가려 산제를 지냈다. 그러나 약 40여 년 전에 동네굿은 중단되었고, 산제도 몇 년 더 지속되다가 이 역시 단절되었다.

풍물은 음력 섣달 스무여드레 정도에 시작해서 집집마다 지신을 밟고 나면 2~3일이 걸렸다. 이러한 지신밟기는 우물굿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당시 7개 정도 되는 마을 우물을 돌면서 “물 잘 나서 1년 내내 물 걱정 않고 잘 먹게 해 달라.”고 축원하였다.

정월 초이튿날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각 가정마다 다니면서 풍물을 쳤다. 집주인은 풍물패가 오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농사지은 보리를 통말에 고봉으로 담고 실타래를 감은 숟가락을 꽂아서 내놓았다. 간혹 돈을 내놓기도 했는데, 풍물꾼들은 집안을 돌면서 한참 놀다가 막걸리 술상을 받아먹고 다음 집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집집마다 다니면서 모은 보리·콩·쌀 등을 장에 내다 팔아 굿과 당제의 경비로 썼다.

풍물은 행마[상모]·기 등 일색을 갖추었는데, 바가지에 수염을 달아 만든 탈을 쓰고 바보짓을 하는 ‘어딩이’라는 탈꾼도 있었다. 풍물놀이가 끝나는 날 저녁부터 무당이 하는 굿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밤을 새워 하는 하루 굿으로 매년 한 번씩 하는 ‘동네굿’이었다. 무당은 이작도[승봉도 옆에 있는 섬]에 사는 부부 무당이 맡아서 하였다.

굿상에는 선주와 각 가정에서 준비한 개인상이 따르는데, 밥그릇에 쌀이나 잡곡을 담고 실타래를 묶은 수저를 꽂아 작은 소반에 올린 것이었다. 무당은 먼저 동네 전체가 1년 12달 아무 사고 없이 고기 많이 잡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굿의 마지막에 무당은 선주들 개개인의 소지를 올리면서 무사 풍어를 기원해 주었다.

이렇게 개인 치성까지 마치면 보통 새벽 2~3시경이 되는데, 이때 ‘대승배’를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 띄웠다. 이것이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가야 좋고 섬으로 다시 밀려오면 좋지 않다고 믿었다. 대승배를 싣고 나갈 때는 풍물을 치고 소리하며 나갔으나, 이 배를 띄워 보낸 후에는 풍물 소리를 내지 않았다. 동네굿이 끝난 후에 날을 잡아 당산을 잡숫는데, 당산에서는 별도의 소지를 올리지 않았다. 동네굿에서 무당이 했기 때문이다.

당굿이 끝나면 동네에서는 50대 전후의 남녀 1명씩을 ‘당제 잡숫는 사람’으로 선출하고 산제를 지내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당산 잡수러 올라간다’고 했다. 당산 잡수러 갈 사람은 미리부터 초상집이나 아이를 낳은 집 등 부정한 곳에는 가지 않는 등 일상생활에서 철저하게 금기를 지켰다. 비린 것도 먹지 않고 1주일간 간장 반찬만 먹었다. 모두 몸가짐을 정갈케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산제를 지내기 전에 산 입구에도 금줄을 쳐 누구든 함부로 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제물은 남자 당주가 인천까지 나가 쌀 1말, 조기 3마리, 사과, 배, 색동사탕 등을 물목대로 구입해 왔다. 제물장을 봐 가지고 마을에 들어올 때는 마을을 통과하지 않고 별도로 마을 뒤쪽으로 돌아 당산으로 바로 올라갔다.

당주들[남여 각 1명]은 산제 잡숫는[열리는] 날 새벽 일찍 당산으로 가 샘을 정리하고 종일 제물을 장만했다. 말을 하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가능하면 말을 하지 않고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준비를 했으며, 제물은 아랫당에 쓰일 제물과 웃당에 쓸 제물을 따로 준비하였다. 제물 준비가 끝나면 남자 당주는 웃당 가는 길을 미리 치워 두고 시간이 나면 잠시 눈을 붙였다.

당주들은 새벽 4~5시경에 일어나 아랫당에 먼저 제를 지내고 이어서 따로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웃당으로 가서 제를 올렸는데, 소지는 없고 동네가 전부 병 없고 우환 없이 잘살게 해 달라고 비손하고 당주 둘이 절을 하였다. 그리고 술을 한 잔 부어 올리고 절하고 밖으로 나와 떡과 과일 등을 조금씩 떼어 동서남북으로 뿌리는 것으로 간단히 끝냈다. 제의 후의 제물은 남녀 당주가 나누어 가지고 내려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고 자기네 식구만 먹었는데, 다른 사람을 먹이면 부정 탄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당주들에게는 수고비를 조금 주었다.

1989년 조사 보고된 풍도의 민속신앙자료집인 『풍도리지』를 보면, 온 마을의 평안과 해상 운행의 보호를 맡은 신을 산신(山神)이라 하여 1~3년마다 음력 2월 중에 제를 지냈다고 하였다.

정결한 남녀[부부도 가함]를 제관으로 정해 놓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3일간 입산 금지와 제관집 출입 금지를 시켰는데, 솔가지와 황토로 이를 표시하여 금기를 지켰다. 제관은 3일간 목욕하고 제물을 준비하되 고기 먹는 것을 특히 금하였다.

제를 지내는 시간은 밤중이며, 기제사 지내는 것과 같이 메 2그릇, 국 2그릇, 기타 제물을 당집에서 준비하여 당 속에서 지낸다고 하였다. 특이한 것은 제관 1명에 제수는 밥 2그릇, 냉수 2그릇, 그리고 포뿐이었다. 고기를 쓰면 화가 있다 했으며 물은 샘물을 썼다. 백지 한 장은 접어 벽에 걸고, 한 장은 바닥에 깔아 상을 놓고 제를 지낸다고 적고 있다.

제비는 집집마다 풍물을 치면서 모은 쌀과 보리 등의 곡물을 현금으로 바꾸어 사용하였고, 무당에게도 별도의 수고비 없이 개인이 치성으로 올린 제물인 곡물을 거두어 가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현재 풍도의 당집은 후망산 중턱 북편의 잡풀과 나무들이 우거져 접근이 어려운 형편이다.

원래 당집은 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약 30여 년 전의 새마을운동 때 미신 타파라는 명목과 교회의 유입, 새로 부임한 기독교 계 선생님의 권유로 당제를 지내지 않아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만큼 퇴락하였다.

그런데 당시 마을 이장을 보던 나태룡[81세] 옹이 중심이 되어 현재의 위치로 당집을 옮겨 지었다고 한다. 당집 안에서는 식사도구, 떡시루, 술잔 등의 제기를 보관하였을 뿐 별도로 모신 것은 없었다. 당제를 지낼 당시에는 아랫당과 웃당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아랫당에는 당집이 있고 웃당은 산 위에 큰 고목나무 아래에 마련되어 있었다. 지금도 웃당 신목은 남아 있다.

[정보제공]

  • •  나태룡(남, 1928년생, 풍도동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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