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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B020404
지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현우

삼천리 마을에서는 약 50여 년 전까지도 터미산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마을 입구의 서낭당에서 서낭제를 지냈다.

터미산 산신제는 삼천리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중요한 마을 제사였다. 산신제는 매년 정월 대보름 안에 천문역법을 잘 아는 마을 어른이 정하는 길일을 택하여 터미산 정상 부근의 서낭[참나무]에서 지냈는데, 제관은 지난 1년간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긴 사람 중에 1명을 뽑았다. 제관이 되면 산신제를 지낼 때까지는 몸을 정갈히 하고, 짐승을 잡거나 흉한 것을 보는 등의 부정한 일을 하지 말아야 했으며, 부부관계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산신제에는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마을 남자들이 거의 대부분 올라가서 함께 참여했다. 산신제는 1명의 제관만이 잔을 따르는 단잔례로 지냈다. 제사음식으로는 소머리와 시루팥떡을 준비했으며, 산신제의 비용은 형편에 따라 집집마다 조금씩 쌀이든 돈이든 갹출해서 썼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산신 신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틈에 산신제를 지낸 곳도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기독교 신앙이 들어오면서 마을과 개인의 길흉화복을 산신이나 당나무에 기대는 일은 효험이 없다는 인식이 퍼진 때문으로, 이제는 마을의 신성한 장소라든가 신성한 기운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도 없어졌다.

삼천리 마을 서낭당은 윗삼천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

서낭당 앞에 있는 당나무는 수백 년 된 참나무이다.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서낭제와 우물 고사가 함께 진행되었으나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우물 고사는 완전히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서낭당 인근에 길을 내다가 일본인들이 일부러 서낭을 못 모시게 하려고 서낭나무 쪽으로 길을 내려고 했으나, 인부들이 계속해서 원인 모를 사고를 당하자 서낭을 피해 길을 내서 당나무가 보존되었다고. 원래 있던 신목(神木)은 1950년대 고사(枯死)하여, 그 뒤 바로 옆에 서 있던 참나무를 현재의 서낭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참나무 옆에 엄나무도 서 있는데, 신목은 아니다.

서낭제는 매년 섣달 마을 사람 중 깨끗한 사람을 뽑아 제관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제관은 보통 마을 연장자가 맡고 당주는 마을 이장이 맡았다. 제물은 소머리와 약주, 통북어를 쓰고 다른 제물은 놓지 않았다. 제를 지내는 날 자정이 되면 제관과 당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서낭 나무로 모였다 제물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서낭님에 대한 감사함을 담은 축문을 읽고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서낭제를 끝내고 마을 4곳의 우물을 돌며 정성을 들였다. 이때는세 가닥의 옻나무를 삼각으로 지탱하여 우물을 두르고 옻나무 가운데에 새끼줄을 늘여 쇠고기 두어 근을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우물 앞에 세 잔의 술과 제물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축원을 하였다.

당나무 옆에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하나씩 던져서 쌓은 돌무덤이 있다. 현재 서낭당에는 삼천리 마을 출신의 무속인이 당을 지키고 있다. 근래 들어 마을 차원에서 서낭제를 지낸 적은 없으나, 2003년에 구석말 앞으로 대림아파트 단지 공사를 할 때 건설사에서 1,000만 원을 들여 고사 겸 서낭굿을 크게 했다.

[정보제공]

  • •  조희찬(남, 1930년생, 건건동 거주)
  • •  장동호(남, 1947년생, 건건동 거주, 전 안산시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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