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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거리 만세시위에 참가하세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A030202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대광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비석거리 시위 현장이었던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현 안산시 수암동]은 구 안산치소(安山治所)가 있던 곳으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 보통학교, 향교 등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이날 비석거리[碑立洞]에는 당시 시흥군 수암면의 18개 리(里)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1916년 당시 수암면에는 1,592호 8,120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남자가 4,112명이었다. 남자 인구 가운데 노인과 아동들을 제외하고 2,00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수암면민의 대다수가 시위에 참가하였음을 보여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날 읍내의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통문이 각 고을의 이장에게 돌았기 때문에 더욱이나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시위는 유익수와 윤병소가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지휘 인솔하였으며, 수암면 읍내에 있는 수암경찰관 주재소·수암면사무소·안산보통학교 및 공자묘(孔子廟 )[안산향교] 앞으로 몰려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농민들의 대부분은 1910년대 서당교육이나 교육 계몽운동의 혜택을 받은 자들로서, 유교나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은 향촌 사회 내의 지식인 부류였음을 알 수 있다. 재판기록에는 시위 주동자들의 생업이 ‘농업’으로 표시되었고, 유생들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대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석거리 만세시위에서도 알 수 있듯 3·1운동 당시 농촌의 각 마을에서 만세운동이 실현되는 과정에는 이장(里長)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장들은 조선 각지의 시위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자기 동리에서도 사람들을 규합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등 마을 단위의 운동을 촉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이장이 면리제(面里制)의 전통 하에서 마을 단위 공동 행동의 대표자로서 말단 실무를 관장하거나 마을의 여론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윤병소(尹秉昭)는 29일 화정리에서 이봉구(李鳳九)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리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 대열에 참여하였다. 또한 산현리의 윤동욱(尹東旭)은 볼 일이 있어서 수암면 화정리에 왔다가 능곡리 농민으로부터 비립동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만세를 부르면 조선독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비석거리로 갔다. 이렇게 당시 시위를 주도한 6명 중 김병권을 포함한 3명은 모두 화정리에서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는 화정동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대한 소식을 먼저 알았고, 널리 전파하는 데도 중심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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