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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666
한자 改新敎
영어음역 Gaesingyo
영어의미역 Protestant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진용

[정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분파.

[개설]

안산시에 개신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생활권과 문화권이 같은 주변 지역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안산시와 가까운 시흥시와 안양시에 개신교가 전해진 것은 1895년 감리교회인 덕고개교회[안양시 호계1동]와 무지내교회[시흥시 무지내동]가 세워짐으로써 비롯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감리교회[1895], 장로교회[1910], 성결교회[1939] 등의 개신교가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면서 강원도와 충청도를 포함하는 중부 지역과 서해안 지역이 선교 지역이 되었음은 두루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흥 지역의 개신교]

1896년 『조선감리회 연회록』에 기록된 스크랜튼(W. B. Scranton) 선교사의 보고에 따르면, “또한 우리는 시흥, 고천, 동막, 용시, 양천에서 선교하였다. 이러한 지방에 나의 어머니나 나 자신이나 또한 우리의 조사(助事)들이 1년 내내 방문하였다.”라고 하였다. 신자 통계는 시흥 지방 입교인[full number]은 1명도 없고 세례 받은 학습인[probationers baptized]이 1명, 세례를 받지 않은 학습인 11명으로 모두 12명이었다.

『조선감리회 연회록』은 전년도의 활동을 보고한 것이므로, 개신교가 시흥에 전래된 것은 1895년이다. 여기에서 ‘시흥’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무지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무지내는 현재 시흥시 무지내동을 말하는데, 이곳은 안양시 박달동에서 나오는 도로와 수인산업도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인천 쪽으로 500m 가서 광명시[북쪽] 쪽으로 약 2㎞ 더 가면 서쪽에 있다.

무지내교회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시흥 북지방 소속으로 시흥·안산·수원·공주 지방 개신교의 어머니 교회이며, 유급 사역자인 구역장이 순회 목회를 하는 교세가 큰 교회이다. 1901년 무지내교회 신도는 97명에 이르렀는데, 이때 100여 명이 모였다는 것은 대단한 교세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시흥시의 군자교회·오이도교회, 안산시의 화정교회·샘골교회·선부교회·성광교회로 계승 발전되어 오고 있다.

안산시와 시흥시 개신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로 김동현(金東賢)[1869~1928]을 들 수 있다. 김동현은 부천군 소래면 무지리에서 출생하여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에서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배재학당 출신으로 무지내교회를 창립하고 안양 삼막골교회를 지원하였으며, 수원 수양관 터를 매입한 일로 관찰사에게 구속되는가 하면, 공주에 내려가 전도를 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1901년 수원 지방 권사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시흥 지방 본처전도사(本處傳道師)로 파송되었다. 당시 선교사가 한 지방을 맡는 것이 상례였고 한국인이 담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김동현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안산과 시흥 지역의 개신교 선교는 선교사에 의한 전도가 아닌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기록에 나타난 안산 지역의 개신교]

「죠션 크리스도인 회보」[1897년 4월 7일자]에는 안산 읍내에서 리드(C. F. Reid)[한국명 이덕(李德), 1849~1915] 목사가 선교한 대목이 나온다. “지내간 이십일 일 쥬일에 안산 읍내에셔 리목가 세례 주대 사나희 닐곱과 녀인 둘과 어른  셋시 세례 밧고 다 사은 원입교인이 되었다더라.” 이때 리드는 스크랜튼의 주선으로 한국인 조사의 도움을 받아 서울 근교에서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7년 동안 안산 지역의 선교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1905년 발간된 『조선감리회 연회록』에 다음과 같은 버딕(George M. Burdick)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수원 구역 오미, 선납재 그리고 고주물(Ko Chyu Mul)[지금의 안산시 화정동] 등 새로운 세 그룹을 등록시켰는데 각기 24명, 31명, 94명의 명단이 작성되었다.”

기록에서 고주물의 신도 수가 오산의 4배, 선납재의 3배에 이르는 것은 이 지역이 월등하게 부흥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조선감리회 연회록』에는 같은 선교사의 보고서에 고주물이 한 번 더 거론된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다가오는 곤경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아니면 분쟁으로부터 백성과 신앙 그룹을 도와주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호소를 받았다. 남양 구역은 전도사 박세창, 수원 지역은 각 전도가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신도들의 이주로 해산된 막골과 최근 수원 구역에 등록된 선납재와 고주물은 이 호소에서 제외되었다. 무지내·삼막골·덕고개·오미는 일본인과의 분쟁으로, 아리실과 장내는 토착민의 박해로 고통을 받고 있다.”

이 기사는 개신교 초창기 안산 지역 교회들이 일본인과 토착민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나 고주물은 선교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신도가 94명이나 되었다는 먼저 기록과도 연관이 된다.

[안산 구역의 변천]

안산 구역의 중심 교회가 무지내교회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지내 구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1910년경 무지내 구역은 수원 지방 9개 구역 가운데 큰 구역으로서 입교인 57명, 학습인은 172명이나 되었다. 1912년 안산군에 여러 교회가 있음을 감안하여 무지내 구역을 안산 구역으로 바꾸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안산 구역에는 7~8개의 교회가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교회가 무지내교회였고, 그다음이 천곡교회[지금의 샘골교회]였다. 당시 안산 구역 형편을 보면 입교인 78명, 세례인 8명, 학습인 309명, 원입인 209명으로 점진적인 부흥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이 당시[1907~1934] 안산 구역 담당자는 김동현[1909~1912], 김동일[1912~1919], 김영렬[1919~1923], 김광식[1923~1928], 김홍제[1928~1931], 유철수[1931~1934] 등으로 무지내 순회 구역과 안산 순회 구역의 담임자인 김홍제 목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지내교회에 주재하면서 안산 구역을 순회 목회하였다.

1931년 목사 한 사람만으로는 넓은 구역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장명덕 전도사를 두고 담임목사는 무지내교회에, 전도사는 천곡교회에 주재하게 하였다. 1934년 안산 구역을 동구역과 서구역로 나누고, 동구역은 천곡·반월·둔대·야목 등 4개 교회를, 서구역은 무지내·거모리·화정리·원시리·오이도 등 6개 교회를 관할하게 하였다.

1934년 안산 구역 담임자로 부임한 이종권 목사는 이듬해 화정리교회와 거모리교회를 각 12칸 규모로 새로 건축하고 봉헌식을 가졌다. 1941~1951년에는 친일 교단과, 광복 후에는 감리교회 분열 등 파송기 미상으로 인하여 정확하지가 않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정부 공업화 정책이 이루어지고, 1978년 반월신도시가 형성되면서 안산은 외지에서 들어오는 인구로 인해 급속하게 팽창하였다.

1960년 이전부터 군자교회·화정교회·천곡교회·선부교회[목내리]·성광교회[원시리]·둔대교회·야목교회·반월중앙교회 등이 안산 구역에 뿌리를 내렸고, 1962년 인천제일교회가 고잔역 근처에 제일장로교회를 개척·설립함으로써 안산 복음화에 새로운 장을 열었는데, 반월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신도들로 교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1979년 동산교회가 문을 열고, 이후 꾸준히 성장하는 가운데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인성교육을 통하여 공교육에 힘써 왔다. 1993년 창립된 꿈의 교회는 현대 교회 부흥의 모델이 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힘써 왔다.

[현황]

20여 년 전 안산 지역 개신교는 공단 배후 도시로서 개발된 신도시에 수십 개 교회가 활동한 것이 고작이었으나 지금은 42개 교단 900여 교회 20만 신도가 넘는 교세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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