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유복문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554
한자 遺腹文書
영어의미역 A Document of A Posthumous Child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현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담|지혜담
주요 등장인물 이씨|정생|양씨|방물장수 설파
관련지명 시흥|한양|예산 노루지
모티프 유형 이씨 부인의 지혜|유복문서|재산 찾기

[정의]

경기도 안산시 일대에서 유복자의 재산 찾기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88년 경기도청에서 발간한 『경기도 전설지』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1999년 안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안산시사』에 재수록하였다.

[내용]

“원참, 별일도 다 있네. 어린 새댁이 상제(喪制)가 된 신랑한테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증서를 써 달라 하니.” 이것은 신랑 부친의 장사 마당에서 뭇사람끼리 웃고 쑥덕거리는 소리였다. 신랑은 지금 장사 중에 있는 망인(亡人) 서울 정 진사의 외아들이었다. 정 진사는 전실 소생인 외아들과 후취인 양씨를 거느리고 많은 세전(世傳)의 재산을 지켜 가며 50평생을 안락하게 지내던 중 7일 전에 아들 정생(鄭生)을 시흥 땅 이 진사의 집으로 장가를 보내 놓고는 그 당일로 사망하고 말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새신랑 정생은 장가를 갔다고 하나 이 진사의 딸과 초례만을 지낸 채 미처 신방도 차리기 전에 부친이 사망했다는 급보를 받고 황망히 한양 본가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한양으로 올라와 부친의 장례를 치르던 상주 정생은 부친을 모실 묏자리를 찾던 중 마침 처갓집 뒤에 있는 처갓집 소유의 산에 마땅한 자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지관(地官)을 데리고 시흥으로 다시 내려왔으며, 그 묏자리를 보러 가던 중 산 밑에 있는 처갓집을 들렀다.

처갓집으로 말하면 장인 되는 이 진사는 별세한 지 이미 오래고, 장모만이 홀로 외동딸과 살고 있었다. 아무튼 초례만 지내고 신방치레도 못해 본 채 돌아간 신랑이 뜻밖에 다시 오고 보니 비록 상제가 된 신랑이지만 장모 되는 이 진사 부인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아이구, 이 사람! 이게 웬 일인가!” 장모는 사위의 손을 이끌어 딸의 방으로 들게 했다. “참 선후도 잊었네. 그래 상사(喪事)를 당하여 얼마나 애통한가? 얘야, 아무튼 네 남편인데 내외할 것 뭐 있니? 어서 이리 들어오너라.” 장모는 딸을 불러들여 신랑 앞에 같이 앉게 했다. “어린 외톨 상주가 너무 애통하다 하여 몸을 상하게 해서는 도리어 망자에게 불효가 되느니. 잘 먹고 몸을 자중해야 하네.”

장모는 이렇게 위로해 가며 점심상이니 술상이니를 차려다 사위 앞에 놓고 딸을 시켜 술을 따르게까지 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처갓집 산에 묘를 쓰러 왔다는 얘기가 나왔고, 장모가 승낙했음은 물론이었다. 이제는 장모 덕분에 배가 부르고 거나하게 취기가 돌아 일어서려고 할 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장모가 좀 더 있다 가라고 만류하기도 하고, 본인 역시 아무리 초상 중인 상주라 해도 백년해로 할 색시를 앞에 두고 보니, 얼른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좀 더 쉬다가 가게나.” 장모가 또 이렇게까지 말하면서 일부러 피하듯이 밖으로 나가 버리니 달랑 신랑신부 둘만이 한방에 마주앉아 있게 되었다. 이런 경우 설사 철이 난 상제라 할지라도 철석간장(鐵石肝臟)이 되기 어려운 법, 하물며 거나하게 취기까지 오른 새신랑 정생으로서는 새색시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한 함박꽃 같은 얼굴, 얇은 옷 밑으로 살짝 드러낸 오동통하고 하얀 젖가슴, 날씬한 허리 맵시……. 온통 정생의 눈을 흐리게 하였다. 그만 정생은 견딜 수가 없어 새색시의 허리를 얼싸안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제 그만 가 봐야겠어.” 주섬주섬 옷매무시를 다시 갖춘 정생은 싱겁게 한 마디 남긴 채 묏자리를 보러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일을 마친 후 곧장 한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오늘 장례식 날이 되어 정생이 다시 처갓집 뒷산에 나타나자 해괴하게도 새댁이 산에까지 쫓아와서 정생의 옷깃을 당겼다. “당신이 내 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는 문서를 써 주세요.” 이 말에 정생은 그만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나무 그늘이라도 수백 명 회장꾼[會葬人]이 보고 있는데도 신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듯 싶었다.

“어서 써 주세요.” “무엇을 써 달란 말이요? 실성한 사람처럼!” 상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실성한 게 아니라 당신이 지나친 거예요. 아무튼 써 주세요.” “도대체 뭘 어떻게 써 달란 말이오?” “당신이 친산(親山) 일로 처갓집에 들렸다가 대낮에 새댁과 상면을 했는데, 그때 새댁의 옷을 벗기고 몸을 섞고 갔다는 말을 써 달란 말이에요.” “여보, 당신은 내 아내요. 도대체 나를 망신시켜도 분수가 있지. 무엇 때문에 그런 걸 써 달라는 거요?” 그는 이렇게 사정하듯 말했다. “까닭은 훗날 아실 거예요. 하여튼 저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깊은 사연이 있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러는 거니 어서 써 주세요.” 새댁은 새댁대로 이렇게 사정을 해 가며 붓과 벼루를 들이댔다.

정생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 미친 척하고 한 장 써 주는 게 오히려 망신이 덜 되겠다. 또 몸을 섞은 게 사실이니까.’ 이렇게 생각한 정생은 마침내 붓을 들어 새댁이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글을 써 주었다. 나무 그늘에 구부리고 앉아 이러한 증서 한 장을 써서 새댁 이씨에게 건네주니, 이 꼴을 구경하던 뭇사람들은 웃고 쑥덕거리고 야단이었다. 마침내 큰 이야깃거리를 지닌 채 회장꾼들과 상주는 한양으로 돌아가고, 새댁 이씨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의당 순서가 상가(喪家)의 애통이 가시기를 기다려 신부의 집에서 신랑 정생을 다시 맞이하여 신방을 새로 차려 주고 우귀(于歸)를 시켜야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장례를 치른 지 불과 7일 만에 상주 정생, 즉 새신랑이 이름 모를 병으로 또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새댁 이씨의 애통함은 말로 다 형용키 어려웠다. 그러나 새댁은 이러한 변고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울고불고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새댁은 신랑의 장례가 끝난 후 ‘죽어도 정씨 가문의 귀신이 되겠다’는 전갈을 시댁에 보냈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혼인 절차 중에 있기는 했으나 신방도 꾸미지 못하고 홀로 된 새댁을 데려갈 턱이 없었다. 더욱이 시아버지 장례식 날 산으로 와 신랑에게 해괴한 망신을 시킨 미친 새댁을, 그것도 정생의 친모가 아닌 계모가 달갑게 여길 리 없었다. “절대로 내 집 문전에는 발도 들일 수 없다.”

거절을 당한 새댁 이씨는 결코 미친 여인이 아니었다. 이씨는 지그시 자기의 깊은 예견을 되새기면서 봄바람·가을비를 이겨 내며 아침저녁으로 늘 남편의 명복을 빌기에 골몰하였다.

그 이듬해 봄 이씨는 옥동자, 즉 유복자를 낳았다. 바로 이때부터 이씨의 선견지명이 위력을 발휘하였다. 만일 그 유복문서(遺腹文書)를 받아 두지 않았더라면, 다시 말해 정생이 그때 묏자리 문제로 처갓집에 들려 새댁과 상면 중에 새댁과 몸을 섞고 갔다는 사실의 문서를 정생에게서 받아 두지 않았더라면, 또 그러한 사실을 그 당시의 화장꾼들에게 소문 내 두지 않았더라면 지금 태어난 이 아이가 정생의 유복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할 도리 없이 멀쩡한 아들에게 불의의 사생자(私生子)라는 누명을 씌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씨가 새신랑 정생이 며칠 안 가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알게 된 데는 까닭이 있었다. 신랑이 처음 온 처갓집에서 상주의 몸으로 대낮에 참지를 못하고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중정(中情)이 허한 사람이니, 얼마 살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가 수일 전에 급사하였으니 아들에게도 그 여화(餘禍)가 미치지 않을까 염려를 했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부부가 동침한 증거 문서를 받아 두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한양 갑부 정 진사 집의 유산을 물려받을 아이로구나!” “정말, 정 진사의 혈속이라곤 이 아이밖에 더 없군!”, “그런데 왜 정 진사 집에는 기별을 하지 않을까?” “정 진사 집에는 죽은 정 진사의 미망인 혼자 있어 그 엄청난 재산을 혼자 차지할 텐데. 어서 바삐 이 유복자가 들어가 그 집 재산을 물려받아야지.”

동네 사람들은 유복자가 태어나자 모두 자기네 일처럼 떠들어대고 야단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떠들게 된 것도 사실 그 유복문서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복 아들이 탄생한 사실을 정씨 가문에 기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씨 가문에서 먼저 이 사실을 알고 시댁 계모가 펄쩍 뛰었다. “초례만 지내고 돌아온 신랑이 무슨 아이를 들게 했단 말이냐?”

그러나 이씨는 시댁이 어떻게 나오든 그저 입을 꼭 다물고만 있었다. 유복문서 같은 것을 증거로 삼으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 없는 가엾은 아들에 대한 신명(神明)의 보우(保佑)를 바라는 자장가와 눈물로써 세월을 적셔 가며 어린아이의 양육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시댁 정 진사 집이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시댁의 식구래야 이 유복 아들의 계조모(繼祖母)에 해당하는 시어머니 양씨와 종 두 명, 그리고 그 집의 살림꾼으로 있는 홍 서방이라는 사람뿐이지만, 그들이 그 막대한 재산과 금은보화며 세간 등속을 전부 팔아 가지고 야반도주하듯이 이사 가는 고장도 일러 주지 않고 멀리 떠나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상속자인 혈손을 친정에서 기르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던 이씨에게는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씨는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던 듯 이를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여전히 온갖 공력을 어린아이의 양육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유복이라고 지었다. 유복이가 무럭무럭 자라나 어느덧 다섯 살의 고개를 넘었다. 아이도 예사 아이가 아니려니와 어머니 이씨도 보통 어머니가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는 데 대한 정성이 예사 부모와 다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부지런하였다. 그야말로 별을 이고 나가 달을 이고 돌아올 정도로 나날의 해를 논과 밭에서만 보냈다.

이렇게 농사일을 부인 혼자 독담하는 한편 어린 아들도 또한 논두렁, 밭두렁에 갖다 앉히고 여러 가지로 타이르며 가르쳤다. 물론 공부를 시키자면 글방에 보내지 않고는 안 될 일이건만 이씨는 그 아들을 글방에만 맡겨 두기를 불안해하였다. 그래서 새벽마다 밭 매러 나가기 전에 어머니가 손수 책을 들고 아들을 데리고 글방 선생의 집으로 찾아가 글 한 장씩을 배우게 하되, 어머니도 곁에서 함께 배우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낮에는 모자가 그 책을 들고 밭으로 가 일을 하면서 아들은 복습을 하고 어머니는 일러 주었다. 물론 밭두렁에서 책을 본다는 것이 공부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책 곁에서 실물을 가리키며 공부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하늘은 저러하다. 땅은 이러하다.” 이러한 어머니의 정성이 보태지고 보니 아들의 공부는 글방에서 배우는 것 못지않게 성취가 컸다. 또 한 가지 이 마을의 이야깃거리는 이씨가 자기 집으로 방물장수 여인들을 모아 들여 먹이고 재우고 한다는 것이었다. “방물장수가 동네에 와 잘 곳을 찾으면 모두 우리 집으로 보내 주세요.” “왜?” “아시다시피 집이 단조하고 적적해서요.”

이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 놓으니 날이면 날마다 땅거미가 지면 보따리 행상 여인 한두 명씩이 들이닥쳐 인사를 하고 식사를 하고, 그러고 주인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댁은 어디신가요? 어떻게 해서 이런 방물장사를 하시게 되셨어요? 사방 다니시며 구경하신 이야기나 좀 하세요. 나처럼 이렇게 혼자 사는 과부가 많지요? 과부들은 모두 나처럼 이렇게 가난하게만 살던가요?” 이런저런 얘기를 해가며 늘 방물장수들을 사귀고 대접하였다. 그러나 이씨는 아무런 목적 없이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각처에서 들어오는 방물장수들을 그물로 하여 시댁 계모 양씨의 이사 간 곳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또는 집에 드나드는 방물장수 중에는 계모 양씨의 흉한 부탁을 받고 은밀히 끼어 오는 자객(刺客)이 없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그 자객을 찾아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런즉 아들을 꼭 밭두렁까지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고 키우는 이유도 그 자객의 손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건만, 아무도 이런 내막을 짐작한 사람이 없었다.

한 7,8년 동안 이처럼 방물장수 식주인 노릇을 해가며 그들과 친하기를 일삼은 이후, 이씨는 무려 수십 명에 수백 리 타도에서까지 들어오는 행상 여인들을 접촉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방물장수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놀라운 사실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산지사방으로 장사를 다녀 보니 별별 인심도 다 많아요. 충청도 예산 땅 노루지라는 동네엘 가보면 홍 진사라고 하는 천석꾼 부자가 있는데 그렇게 벼를 천 석이나 추수하고 그 고장 땅을 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더 부자가 되겠다고 그 고장 소작인들을 몹시 착취한다고 하더군요. 그뿐 아니라 그의 마누라라는 작자는 성은 양씨라는데 남정네보다도 더 사납게 작인들을 못살게 군다더군요.”

이 말만 듣자 이씨는 ‘양씨! 홍 진사? 홍 서방!’ 하는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방물장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간구(艱苟)한 과댁네에서도 우리 장사꾼들을 이렇게 고맙게 대접해 주시는데 부자가 될수록 인심은 거악해지는 건지, 그 홍 부자 댁인지 양씨 부인인지 하는 여자의 교만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우리들 방물장수가 그 집에 들어가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면 어찌나 기고만장 야단을 치며 나가라고 떠드는지……. 어떻든 그놈의 집에 몇 번 들어갔다가 밥 한 술 못 얻어먹고 혼이 나 쫓겨났구먼요. 그런데 별 이상한 일은 한양 비단장수라던가 뭔가 하는 그 할망구만은 그 홍 부자 집에 단짝으로 드나들며 늘 귓속말로 뭘 쓱싹쓱싹하는지 퍽 재미를 본다고 하더군요. 아마 다 같이 예전에 한양서 산 모양입디다. 모두 한양 말들을 하는 걸 보니.”

이씨는 귀가 번쩍 띄었다. “할망구라면서 기운도 좋은가 보죠? 한양서 그곳까지 장사를 다니니.” 이렇게 슬쩍 물어보았다. “어이구, 할망구라도 젊은이보다 더 씩씩해요. 아참, 그 할망구가 이따금 이 동네에도 드나들던데요. 댁에서도 가끔은 자고 갔을 거요. 그 머리 곱실곱실한 한양 말 하는 비단장수 할망구 말이에요.”

이렇게 되자 이씨로서는 더 의심해 볼 여지가 없었다. “오오라, 그 비단장수 할망구! 성이 설(薛)가라던 하던 그 설파(薛婆) 말이죠?” 이씨는 남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그래, 그 비단장수 할망구가 양씨가 보내는 자객이었어.’ 자객을 보낸 이유는, 말하자면 정 진사의 후실 부인 양씨는 정 진사 생존 당시부터 그 집 살림꾼인 홍 서방과 정을 통하고 지냈었다. 그래서 정 진사가 병들었을 때는 물론 정 진사의 전실 아들인 정생이 병에 걸렸을 때에도 양씨는 전혀 약을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 진사 부자가 죽자 양씨는 홍 서방과 공모해 그 엄청나게 많은 정씨 집 유산을 몽땅 팔아 가지고 감쪽같이 남모르게 충청도 예산 땅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홍 서방은 홍 진사로 둔갑하여 정 진사 집 유산을 저희들 재산으로 만들어 굉장한 땅과 집을 사 홍 부자 노릇을 하며 소작인들을 들볶으며 지내는 것이었다.

저들이 이렇게 몰래 시골로 가 사는 이유는 한양에서는 남의 이목 때문에 정식 부부 행세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더 큰 이유는 과부로 친정에 머물고 있는 전실 며느리 이씨의 몸에서 낳은 유복자가 언젠가는 정씨 가문의 유산을 상속해 갈 것이므로 그것을 따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양씨는 일찍부터 이씨가 낳은 유복자를 정씨 가문의 유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양씨는 이런 억지만으로 만족해하지 않았다. ‘정씨 가문의 유복자라니! 그 아이를 아주 없애 버려야만 내가 다리를 뻗고 홍 서방과 잠을 잘 수 있고, 이 재산을 제대로 차지할 수 있어.’

그래서 양씨는 먼저 한양에서부터 극친하던 설파라고 하는 방물장수를 만나 은밀히 부탁을 했다. “당신은 방물장수이므로 한양과 시흥을 자주 오르내릴 것 아니오. 그 계제에 우리 집 며느리 될 뻔했다는 그 이씨의 집을 어떻게든지 좀 찾아내 몰래 기회를 봐서 그 계집의 자칭 유복자라는 아이를 처치해 없애 주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 계집이 갖고 있다는 그 유복문서인지 뭔지 하는 문서를 훔쳐다 나를 주시오. 일만 성사되면 한 백석 지기 땅을 수고비로 주리다.”

그러나 이씨는 총명했다. 미리부터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거기에 대한 방비책으로 많은 방물장수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후대해 그들의 인심을 샀으며, 한편 어린아이는 늘 자신이 일하는 밭두렁으로 데리고 나가 자신 곁에 두거나, 집에 있을 때에도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 곁에서 재우는 등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기회를 노리던 설파로서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한편 방물장수 노파는 이씨 집을 드나들어 봤지만, 우선 이씨의 지성과 친절에 그 모자를 해칠 마음이 안 났으며, 더욱이 유복이가 정씨 가문의 씨가 아니라고 양씨는 말했지만 실제 이씨 모자의 동정으로 보아 유복이는 정씨 집 혈속이 분명했다. 설파는 차차 양씨의 심보를 미워하게까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유복의 나이 십여 살이나 되던 해 어느 날이었다. 그래도 설파는 한 번 더 시흥 땅 이씨의 집을 찾아갔다. 이씨는 이미 내막을 잘 알고 있었으나 설파에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도 더 친절히 설파를 맞이해 방 안으로 인도했고, 보따리를 받아 선반에 얹고 식사를 대접했다. 밤이 되어 화로를 사이에 두고 설파와 마주앉았다. 서로 쳐다보던 두 여자의 눈동자는 결국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 마침내 이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머니!” “왜 그러우?” “할머니가 이따금 우리 집에 오시는 건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죠?” 약간 떨리는 이씨의 말에 설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총명한 여자가 벌써 내 속을 알아차렸구나!’ 노파는 그만 기가 질려 말이 안 나왔다. “무슨 소리…….”

입만 실룩거리고 있는 노파에게 이씨가 다시 정색을 했다. “할머니, 그러지 마세요! 선선히 달라고 하시면 좋게 드릴 수도 있는 물건을 뭘 그렇게 여러 해를 두고 고심하며 드나드세요. 그 유복문서 말인데요, 내 자식만 살려 주신다면 유복문서는 할머니에게 드려도 좋아요.” “에그머니나! 저, 저…….” 이 말을 들은 설파는 그만 두 손을 벌리고 이씨 앞으로 고꾸라졌다. 설파는 이미 이씨에게 동정이 가 양씨를 미워해 오던 터였다.

마침내 설파는 모든 사실, 즉 양씨의 부탁을 받아 이씨의 유복 아들을 죽이고 유복문서를 훔쳐 내려던 세세한 사실을 모두 고백하였다. “이제 양씨 년의 죄상에 대해서 내가 증인이 되고 증거를 댈 터이니 속히 관가에 알려 그 무도한 계집과 홍가를 혼내 줍시다. 그리고 정씨 가문의 유산을 되찾아 유복이로 하여금 가문을 잇게 합시다.” 10년간 은인자중하며 시기를 기다리며 가운(家運)의 만회를 꾀해 오던 이씨의 목적이 이제 와 완전히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마침내 이씨는 의협심으로 앞장서 가는 설파를 따라 충청감사의 감영을 찾아가 양씨와 홍 부자의 간음과 살인, 재산 횡령 등의 죄상을 고발하였다. 이때 그처럼 세상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유복문서, 이씨가 그토록 소중히 지녀 오던 유복문서 한 장이 재판에 더할 수 없는 증거물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양씨와 홍가가 공모해 가로챘던 정 진사 집의 막대한 재산과 가문은 유복 앞으로 상속되어 돌아왔다.

정유복(鄭遺腹)은 어머니 이씨의 훌륭한 가르침 속에서 공부에 전념해 훗날 매우 어진 선비가 되었고, 벼슬이 집의(執義)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씨 모자는 돌려받은 재산과 토지를 많은 소작인과 시골 빈민들에게 후한 조건으로 경작을 주어 그곳 사람들의 생활이 모두 넉넉해졌다. 그리하여 동네 사람들은 이씨와 정유복을 산부처님처럼 송덕하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유복문서(遺腹文書)」의 모티프는 ‘이씨 부인의 지혜’와 ‘유복문서’, ‘재산 찾기’이다. 초례만 치른 뒤 상을 당한 남편과 하룻밤을 보낸 이씨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받아낸 유복문서로서 유복 아들의 계조모(繼祖母) 양씨의 흉계를 물리치고 재산을 찾는다는 이야기로, 민담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여성 지혜담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