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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159
한자 李正業
영어음역 Yi Jungeop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유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국악인
출신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지도보기
성별
생년 1908년연표보기
몰년 1973년연표보기

[정의]

일제강점기에서 현대 안산 출신의 국악인.

[개설]

이정업은 이성룡(李聖龍)의 손자이며, 이태평(李泰平)의 아들로 대대로 피리·해금·호적·북의 명인 가문이었다. 이정업은 1908년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서 출생하였고, 1973년 3월 20일 간암 등 합병증으로 타계하여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서 화장되었다.

[활동사항]

이정업은 8세 때부터 예인의 길에 들어서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산에 올라 줄을 탔다고 한다. 당대 줄타기의 일인자였던 김관보(金官甫)에게 사사한 이정업은 식사할 때만 줄에서 내려왔을 뿐 하루 종일 줄 위에서 생활한 덕분에 11세가 되던 해에는 평양에서 공연을 가질 수 있었으며, 명인으로서 전국 곳곳을 다니며 줄타기 공연을 하였다.

이정업이 타는 줄은 한 다리로 줄을 딛고 한 다리는 들고 앉았다가 일어났다가를 하는 ‘외옹잡이’를 비롯하여 30여 종에 다다랐으며, 20척이 넘는 높이에 스물다섯발 길이의 줄을 매달고 타기도 하였다. 만주와 일본 등지로 공연을 다녔을 뿐 아니라 영화 「춘향전」에도 출연하였다.

4·19 직후였던 1960년 원주극장에서 줄타기 공연을 하다가 말뚝이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지고 만다. 한쪽 다리가 부러져 1년여를 절뚝거리면서 다녀야 했던 이정업은 더 이상 줄타기를 할 수 없게 되자, 고수(鼓手)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조선성악연구회에 출입하면서 명고수(名鼓手)인 한성준으로부터 북을 사사했으며, KBS 라디오 전속 국악합주단원으로 활약하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고수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김연수와 콤비가 되어 활약하면서부터 더욱 유명해졌다. 김연수를 비롯한 동시대의 명창들은 이정업을 당대 최고의 명고수로 대접했다. 아주 감정이 풍부한 예술가여서 북 반주 중 슬픈 대목이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정업은 북 가락이 기교적이거나 화려하기보다는 소리꾼이 소리하기 편한 ‘보비위 북’을 쳤으며, 정확한 한배와 소리꾼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가락과 특유의 추임새, 특출 난 감수성으로 당대 최고의 명고수로 손꼽혔다.

곡의 빠르고 느린 정도가 정확했으며 장단에 관한 한 장구에서부터 북에 이르기까지, 판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민요, 풍류, 가곡, 가사, 시조 등에 이르기까지 달통한 달인이었다. 말년에 부인이 병이 들고 아들 이재돌이 향정신성 의약품을 흡입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끝내는 빚쟁이에게 집이 넘어가게 되어 단칸짜리 방으로 옮겨 살았다. 그의 핏줄이라고는 손자 이상문이 있었으나 1993년경 교통사고로 사망해 절손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0년 서울신문사 제정 문화대상 기악 부문 상을 수상했고, 이어 우리나라 최초로 고수 부문의 무형문화재로 추천되었으나 지정받기 전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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