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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나리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845
한자 申-
영어음역 Sin Canary
이칭/별칭 신경녀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지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대중가수
출신지 함경남도 원산시
성별
생년 1912년연표보기
몰년 2006년연표보기
대표경력 가수협회 부회장

[정의]

일제강점기에서 현대 안산에서 활동한 대중가수.

[개설]

본명은 신경녀(申景女)이다. 191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여 2006년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신카나리아는 원산루씨고등여학교를 중퇴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으나, 교회를 통해 성악가 이인범의 동생인 이옥현에게 노래를 배웠다. 16세 되던 해 극작가 임서방(任曙昉)이 이끌던 이동악극단 성격의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가 원산 지역에 순회공연을 왔을 때 그를 찾아가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조선예술단과 신무대악극단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혹은 막간 가수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1928년에 「뻐꾹새」와 「연락선」을 취입하여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가수 활동을 하면서 신카나리아라는 예명을 사용하여 한국 최초로 예명을 쓴 가수가 되었다. 후에 임서방과 결혼하였다. 곱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 소래’와 같다는 평을 들었고, 막간 무대에서 부른 「강남달」과 「강남제비」를 비롯하여 「나는 열일곱살이예요」, 「베니스 노래」, 「에헤라 좋구나」, 「애수의 부르스」, 「노들강변」, 「그 님은 떠나고」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이 가운데 원제가 「무궁화 강산」인 전수린 작곡의 「에헤라 좋구나」는 신카나리아 자신이 즐겨 부른 애창곡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봄’, ‘무궁화’, ‘삼천리강산’ 등의 단어들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 노래의 의미는 새롭게 부각된다 할 것이다. 1938년 이후 신카나리아는 음반 발표보다 악극단 공연에 더욱 열정을 쏟아, 빅타레코드사의 악극단, 중국 톈진의 악극단, 신태양악극단, 포리도루실연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김해송이 주도하던 KPK악극단 멤버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후견인이던 임서방과 이별하고, 이익[예명 김화랑]과 재혼하였다. 이후 신카나리아 부부는 새별악극단을 창립하여 전국을 순회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북한군에 의해 끌려가다가 폭격을 틈타 탈출해 온 일화가 있다. 탈출 후에는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위문 공연에 참여하였다. 1960년대에 대한가수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대에는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카나리아다방을 운영하여 동료 가수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1985년 말 동양 최초로 예술 분야 전문 직능인단지로 준공된 안산 성포동 예술인아파트에 입주하여 말년을 보냈다. 2006년 11월 9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가수협회 부회장[1960년], 원로 연예인 상록회 최고위원[1986년]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7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문화체육부 장관상, 1998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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